“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 구약시대에 백성의 허물과 죄 사함을 위해선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부정한 자의 죄사함을 위해선 염소나 송아지의 피를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고 거룩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9-11).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악한 사람이며 죄인이며 허물 많은 사람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요한계시록 22:12-13).주님의 짧은 말씀 속에 크고 깊고 신령한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현실을 보라, 교회와 세상을 보라, 믿는 자와 불신자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내가 과연 참 믿음 가운데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장을 잘 차려 입고도 한 번 더 옷매무새를 거울로 살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사무엘상 1:6).“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하신 목적은보이지 않는 자신을 피조물을 통해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같이 되는 길을 속삭입니다.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입니다.우리 안에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선악과의 문제는 아담과 하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디모데후서 1:9). 기도를 하거나 마음에 소원이 있을 때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받을 거라 말하고 기대합니다.그러나 막연한 기다림만 있을 뿐누구도 하나님의 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에베소서 2:1-2).죄 짓는 것은 쉽습니다.죄를 짓는 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가요?우리의 본성이 죄이며 존재가 죄입니다.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스럽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여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을 헛것이다”(약 1:26). 경건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경건한 사람이 사는 모습이 경건입니다.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죄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죄인 것입니다.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끓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7-18).질문은 어떤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느냐는 것이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디모데전서 6:18 말씀을 묵상하며 내 평생 이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가르쳐라” 하신 말씀을 나 자신에게 향하는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세 가지 명령이 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가장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주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그래서 함께
사십이 넘은 남자한밤중에 일어나서도시의 불빛을 쳐다보고는인생이 왜 그리도 긴지 의아해하고어디서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생각한다.고든 맥도날드의 책 『인생의 궤도를 수정할 때』에 수록된 에드 시스맨의 시 일부이다. 누구나 인생의 한고비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삶의 여정과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며,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창세기
라반과 평화조약을 맺고 잔치를 열고 하룻밤을 보낸 야곱은 고향을 향해 출발한다. 라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축복을 베풀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잘 극복하고 라반의 축복 속에서 당당하게 고향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그러나 야곱을 죽이려 달려왔던 라반이 노기를 풀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곱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이
참된 기도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롭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5-36).나의 정답을 가지고 나아갔다가주님의 정답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결국 나의 정답은 소멸
룻기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을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한다. 떠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텅 비어버린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오미를 채우신다. 안정된 생활을 주시고, 회복의 길을 여시고 이방인 며느리 룻이 메시아의 조상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의 자리를
얼마 전에 만난 이민 간 친형이 나이 들면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민 간 곳에서 성공하고 그 사회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도 나이 들면 고향을 그리고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외국에 나가 선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마음은 동물의 귀소본능과는 차원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보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
야곱은 하란에 도착하자마자 우물가로 갑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우물가로 갔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물은 사람들과 짐승들의 목을 축이는 자리였습니다. 광야 백성이나 유목민들에게 있어 우물은 생명을 보존하는 원천 그 자체였습니다.또한 고대 사회의 우물은 친분을 맺는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삶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