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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명성황후 (2) 명성황후께서는 남자를 능가하실만치 기개가 있으셨고 그야말로 여걸이셨습니다. 그런 반면에는 백장미같이 고결하시고 아랫사람을 대하여는 부드럽기 끝이 없으시기 때문에 황송하오나 친어머니를 대하는 듯한 따뜻한 마음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몹시 인정이 많으셔서 나를 대할 때마다 나를 어루만지시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입시(入侍)를 아니하여도 보고 싶다고 어사를 보내실 때는 참으로 감사히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는 나에게 결혼 팔찌를 친히 주셨습니다. 40년간 한시도 내 몸에서 (팔찌를) 빼지 않고 나의 왼쪽 팔목에 끼고 있는 것은 (황후의) 친 하사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을 때에도 이것만은 팔에 낀 채로 죽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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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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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황후 진찰 (2)엘러즈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큰절을 세 번 했다.“잘 오시었소.” 절을 받은 사람의 음성이 들릴 때 눈을 떠보니 앞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어딘가로 다 사라져 버리고 엘러즈 일행만 남아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어떻게 옷깃 스치는 소리 한번 없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은 어떻게 이러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그 귀부인은 다름 아닌 명성 황후였다.“여의사 엘러즈 문안드립니다.”“이토록 먼 나라에 좋은 일을 하러 와 있는데 불편함 없이 잘 지내는지요? 더구나 여인네의 몸으로”“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나이는 몇 살인고?”“스물 네 살입니다.”“아직 혼인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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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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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엘러즈(Annie J. Ellers)는 1860년 8월 31일 미국 미시간 주 비오크에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일리노이 주 락포드 대학을 졸업할 무렵 어느 부흥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881년 락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톤에 있는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선교를 하려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문의가 되기 위하여 의학 공부를 했다.엘러즈는 1885년 휴가로 일시 귀국한 페르샤 여선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테헤란에서 여자학교를 운영하며 여자 병원을 짓고 있는데 여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엘러즈는 페르샤에 의료 선교사로 가는 문제를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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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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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선교 사역 (2)애덤슨 역시 세례 주는 일에 대하여 매우 조심성 있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895년 1월 3일 기록된 청년 연합회의 캠프(Kemp)씨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자격 없는 사람을 세례 주어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는 일은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하였다. 당시 한국인의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돈을 벌려는 생각이 풍미했고,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유익을 얻을까 하여 쉽게 신자인 척하는 일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세례를 청원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일정기간의 점검(probation)이 필요하다고 하였다.애덤슨 선교사의 내한 이후부터 수세 청원이 있었으나 1895년 11월에 가서야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즉 11월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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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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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1891년 청년연합회의 파송으로 내한하였던 맥카이가 건강상의 이유로 1893년 한국을 떠나게 되자 청년연합회는 새로운 선교사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적절한 선교사 후보를 물색하였으나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청년연합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였던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 지 6개월만에 병으로 죽고, 그 후임이었던 맥카이 목사 또한 겨우 2년만에 악화된 건강 때문에 한국을 떠나게 되자 선뜻 한국 선교를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란 죽음을 각오한 헌신을 요구했으므로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는 일은 자기 희생적인 용기를 필요로 했다.이 당시만 해도 한국은 아직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역사의 어두운 질곡 속에 있었고, 괴이한 풍습과 잡다한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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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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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기지 확보맥카이를 비롯한 호주 선교사 제 2진이 땅을 매입하고자 노력했음을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1893년 5월 초 드디어 이들은 외국인 거류지역 밖의 땅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미국북장로교의 베어드 선교관과 인접한 초량지역으로서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여선교사들은 오랫동안 기도한 결과로 그들의 어학선생을 통해 부산진의 현재 일신병원 자리에 있는 한국인 가옥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맥카이 목사는 1893년 5월 9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친애하는 케언스 씨에게자상하신 편지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에 유의하라는 충고를 항상 유념하고 있습니다. 제 병과 거듭된 어려움으로 땅을 매입하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은 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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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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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입국(2)한국에 온 호주 선교부 제2진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주택의 확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도 맥카이는 “기독교는 이 땅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였고 한국에는 천주교인들은 약 6만 명 있으나 자신이 아는 한 경상남도에서는 아직 개종자가 없었다고 쓰고 있다.비록 주거마저도 안정적이지 못했으나 맥카이 목사는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고, 더 많은 사역자들을 보내달라고 호소하였으나, 그의 아내의 건강과 자신의 건강은 그의 갈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맥카이 목사가 거처로 삼았던 일본인 집은 사실 주택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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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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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한국에 파송된 첫 선교사였던 데이비스가 선교지에 도착한 지 불과 6개월만에 사망하게 되자 호주 교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의 죽음의 결과로 호주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데이비스를 파송하였던 청년연합회(Presbyterian Fellowship)는 데이비스의 후임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기로 하고 적절한 후보를 물색하고 있었다. 당시 청년연합회 회장이었던 로버트 길레스피(Robert Gillespie)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선교사를 보낼 의도가 있다고 했을 만큼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는 과제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1년 발라랏(Ballart)의 성요한 교회(St. John’s Church)의 담임이던 맥카이 목사가 한국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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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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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상애 교회 (2)“맥켄지 목사님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요.”“여러분 내가 아들이 없어서 내 후임을 물려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꼭 약속할 것은 내게 딸이 셋 있는데 공부시켜서 한국 사람에게 보내겠다.”“결국 나환자 사업은 못했지만 맥켄지 선교사님의 딸들이 부산의 일신 기독 병원을 설립하게 된 거죠.”“추마전 선교사님도 아시겠네요?”“알고 말고요. 맥켄지 선교사님의 후임으로 1938년도쯤 오셔서 일하셨는데 2년도 채 안 되어 추방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품은 온유하고 순진하셨는데 일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면 겁을 내는 어른이셨어요.”사람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악조건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는 새로운 기쁨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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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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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상애 교회맥켄지 목사가 운영하던 병원이 있었던 감만동 넘어 용호동에는 맥켄지 목사가 있을 당시에 출석하던 성도가 섞여 있는 ‘상애교회’ (당회장 이상붕 목사)가 있었다.호주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찬 리뷰’지(발행 겸 편집인:권순형/ 편집국장:김명동)에서 2000년 4월부터 11월까지의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찾아서’의 6월호의 기사는 지금의 ‘상애교회’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기록에 의하면 이미 1904년에 어빈(한국명:어을빈)과 빈톤 의사(Dr. Irvin and Vinton) 그리고 스미스 목사(Rev. W. E. Smith) 등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나환자를 돌보는 일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나환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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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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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부산 나환자 수용소 (2)맥켄지는 본래 정식 의사는 아니었다. 짧은 기간 의료 교육을 받은 일은 있었으나 나환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간간이 필요한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931년에 시험을 거쳐 의사 면허를 받았다. 이제 그는 합법적인 의사 면허 소지자로서 환자가 사망했을 경우 자신이 직접 사망 확인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환자 수용소가 아닌 나환자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4년 2월 나환자 수용소 내의 새로운 병원 건물 헌당식이 있었다. 특히 이날 개원식에는 호주 장로교 총회장이 참석함으로써 더욱 의미 있는 개원식이 되었다. 총회장인 맥카우레이 목사(Rev. R. W. Macaulay)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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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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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맥켄지는 5주간의 긴 여행을 거쳐 1910년 2월 2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물론 이 기간 계속 여행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서 4일간 체류하였는데, 이때 CMS 선교사와 함께 지냈고 상해에서 1주일간 체재하였다.그가 부산항에 도착하였을 때 엥겔 선교사 부부, 무어, 니븐 등이 마중 와 주었고 심취명 장로, 박장로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그의 부산 도착을 환영해 주었다.맥켄지는 일단 엥겔 목사 집에 머물면서 이곳에서의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6월에는 진주를 방문하였는데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전에 일했던 뉴 헤브리디즈와는 다르다는 점을 체험하는 날들이었다. 기후와 계절은 물론이지만, 관습과 풍습이 달랐고 주거 환경과 촌락 구조가 달랐다. 그가 여전도회 연합회가 발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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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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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아일 유(Isle Ewe)라는 섬에서 아버지 케네드(Kenneth) 매킨지와 어머니 케더린(Catherine) 사이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맥켄지가 5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의 삶은 순탄하지 못하여 16세가 되던 1881년 10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난 그는 1882년 봄 글라스고(Glasgow)로 갔다. 이곳에서는 드와이트, 무디, 생키 등 미국의 부흥사들에 의해 전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신앙 부흥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맥켄지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무디의 설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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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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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땅에 묻힌 밀알아침에 일본인 의사는 진찰을 끝내고 나오면서 고개를 저었다.“급성 폐렴(肺炎)이 악화되고 있어요. 가망이 없습니다.”게일의 극진한 간호와 도움도 소용없이 데이비스는 게일의 손을 잡은 채 평화로운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이었고, 부활 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데이비스에게나 게일에게나 부산은 낯선 곳이었다. 장례식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면 마을 사람들이 펄쩍 뛸 것이다. 게일의 조수 이창직과 그동안 가깝게 지내던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산기슭까지 운구(運柩)를 하고 매장을 했다.남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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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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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입국(2)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중이던 당시 육영 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씨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벙커씨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10월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때 마중 나온 감리교 선교사 존스(Jones)를 만났고 곧 이어 헐버트(H. B. Herbert) 등을 만났다.다음날 아침 8시경 말을 타고 서울로 향했고, 의사 헤론(Dr. J. W. Heron), 스크랜튼 부인(Mrs. Scranton) 그리고 데이비스보다 5주 앞서 입국한 맥길 의사(Dr. McGill) 등 미국 선교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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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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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이번 호부터 연재되는 데이비스 선교사 편은 2009년 3월에 본지에 연재되었던 데이비스 선교사 편에 새로운 내용을 보강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소명조셉 H. 데이비스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의 왕가라이(Wangarai)에서 아버지 찰스 데이비스(Charles Davis)와 어머니 마가렛(Margaret Sandeman)의 9남 3녀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모는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한 매우 경건하고도 열정적인 신앙인이었다.데이비스는 11살때 신앙 고백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데이비스가 12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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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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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엥겔(Gelson Engel)은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워템베르그(Wurtemberg)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였고 힘겨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엥겔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뉘르팅겐에 있는 뤼르 세미나(Lehrer Seminar)를 졸업(1883~1888)하였다. 그는 에빙겐(Ebingen)에서 열렸던 어떤 선교 모임에 참석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1889년 8월 29일 선교사 교육 기관인 스위스 바젤(Basel)에 있는 ‘바젤선교교육원’(Basel Mission House)으로 가서 3년간 신학 교육과 선교에 대한 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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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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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유년 시절카우만(Charles Elmer Cowman)은 1868년 3월 13일 미국 일리노이 주 토우론에서 아버지 데이빗 카우만(David Cowman)과 어머니 메리 키이즈(Mary Keyes)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병약하게 태어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1870년 5월 그가 2살이 되었을 때 이사를 하는 길에 날이 저물어 에스테이트 고속도로변 여행자 휴식처에서 묵게 되었다. 그때 온갖 야생 꽃들이 만발하여 넓은 들판을 뒤덮고 있었는데, 찰스 카우만의 부모는 다음날 그곳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농장을 마련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카우만은 그곳에서 자라서 학교에 다니며 주일이 되면 5마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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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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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요리 문답 (2)‘또 틀리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정도로 맞기까지 했으니 아버지가 엄청 미웠고, 교회를 다녀야 하나라는 반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매 덕분에 소요리 문답을 다 외웠고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터득한 신앙생활의 원칙들이 지금 나의 삶을 굳건히 이끌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모두 아버지의 소중한 은혜이다’라고 했다.1984년 4월 10일, 휴 린튼은 농촌 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 요양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지프 뒤에 건축 자재를 실은 트레일러를 달고 회전하는 차를 맞은 편에서 오던 관광 버스가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관광 버스 기사는 음주 운전 상태였다. 휴 린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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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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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소명휴 린튼 (Hugh Macintyre Linton)은 1926년 장로교 목사 윌리엄 린튼과 어머니 샬렛 벨 린튼의 셋째 아들로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다. 신사 참배 반대로 1940년 11월 14일 온가족이 강제 출국 당했을 때 휴 린튼은 14세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어스킨 대학을 졸업하고(1944~1947), 1950년 컬럼비아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1950~1953)를 졸업했다. 휴 린튼은 1954년 아내 로이스 린튼과 세 아들과 함께 입국했다. 그의 선교 지역은 전라남도였다. 휴 린튼은 순천으로 부임했다. 휴 린튼가(家)의 머릿 속에 아로새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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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10.03.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