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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대제사장의 기도라 일컬어지는 이 기도에서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고백하면서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먼저 죽음이란 하나님과 하나됨의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나그네처럼 한 세상을 살던 한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흙으로, 영적으로는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죽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가 아니라 본질로의 통합을 이룸으로 영원한 존재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또한 죽음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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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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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구약성경에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건이 있습니다. 그 싸움은 원래 백이면 백 사람 모두 골리앗의 통쾌한 승리로 끝나리라 예상했습니다. 골리앗, 그는 키가 구척인 백전노장입니다. 게다가 갑옷부터 투구까지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직도 젖비린내 가시지 않은 꼬맹이 목동소년이었습니다. 게다가 갑옷도 입지 않았고 무기라고는 지팡이와 물매와 매끈매끈한 돌 다섯 개뿐이었습니다. 실로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습니다. 다윗의 시체가 까마귀의 밥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그러나 이긴 것은 다윗입니다. 골리앗이 지상전을 펴는 동안 그는 돌을 날려 공중전을 폈습니다.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싹둑 잘랐습니다.누구나 다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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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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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요한복음10:17“빛이 조지아를 떠났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목매달아 죽인 사건이 일어난 밤을 묘사한 노래입니다. 정말 빛이 사라져 세상이 캄캄해졌던 날이 있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던 날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 곧 죄인 아닌 죄인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한복판에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혐오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과 그들의 문화를 잘 몰랐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에게 무자비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자신들에게는 사형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여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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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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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시카고는 겨울이 춥고도 깁니다. 10월 하순부터 추워지는 날씨는 4월 하순까지 그대로 이어지지요. 얼마 전에는 영하인 F -15도까지 내려갔습니다.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체감온도는 그보다 훨씬 더 내려가곤 하지요. 요즘 저는 겨울을 잘 보내시라고 인사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춥고도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고 일교차가 심하다보면 몸의 저항력이나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장정도 한두 번 감기나 몸살을 앓곤 하지요. 안전사고도 자주 일어납니다. 빙판길을 잘못 내딛다가 낙상을 당하기도 하구요 눈길에 차량사고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컨디션 조절과 안전사고에 특히 유의해야 할 때입니다. 둘째는 우울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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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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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두목(頭目)이라면 대개 깡패두목을 연상하게 된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머리와 눈’이 아닌가? 그런데도 담임목사, 본당신부, 주지승을 두목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조롱 섞인 모욕이다. 하기야 요즈음에는 그들이 두목만도 못하다는 비아냥도 있지만... 그래도 두목이라는 낱말은 나쁜 감정가치로 염색되어 버렸다. 만약 대학교 총장을 아무개 두목이라고 신문기사를 썼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1920년대에는 두목이라는 말이 매우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때 발행된 신문에는 ‘배재학당 두목’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배재학당의 교장 그러니까 학당장을 존경하여 붙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두목이란 말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감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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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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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마태복음 2:1-12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본 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간 것과 같이 우리 인생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본 후에는 새 방향을 잡게 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 관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동방박사들의 수나 그들의 나라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뜻깊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들을 가리켜 와이즈맨으로 번역했습니다. 현자 또는 지혜자란 뜻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지혜자입니다.성경은 박사들이 하나님의 지시로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고 그 앞에 경배하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이 결코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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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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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사건을 연속적으로 접하면서 우울증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제 주변에도 우울증으로 인해 고생하고 계신 분, 고생하셨던 분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빨리 털고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아픔을 겪는 본인도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를 옆에서 바라보는 주변사람들도 매우 힘들다고 하더군요. 특히 우울증에 대한 잘못된 상식과 오해들로 인해 고통이 심화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중 본인의 의지가 약해서 낫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생각이며 위험한 착각이라고 하더군요. 우울증은 우울감과는 다른 증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인도 어쩔 수 없어서 겪는 고통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밖에도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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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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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전공은 종교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의 교수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이력서와 교수 추천서를 보내 놓고 거위처럼 목을 빼고 좋은 소식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거의 다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교포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마침 지성인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신앙 성향과 비슷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첫 번 설교를 듣고 나서는 아예 담임목사로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로 발령 날 때까지로 시한을 정하고 목회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지성과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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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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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마태복음 2:1-12우리는 얼마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습니다. 이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모두 가셨습니다. 행사도 끝나고 장식도 다 치워졌습니다. 성탄 캐럴도 들리지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가 놓였던 자리에 다른 상품들이 진열되었습니다. 올 연말까지는 성탄 관련 물품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크리스마스의 별을 보고나서 아기 예수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성탄 소식을 알려준 별이 여행길 내내 안내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그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어가며 왕으로 나신 이를 만나기까지 여행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른바 네이티비티라고 하는, 말구유의 아기 예수와 그 부모, 그리고 목자와 동방박사들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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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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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대답이 여럿입니다. 우선 쉽게는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맨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에 땅의 재료인 흙으로 몸을 만드셨고 하늘의 재료인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역순으로 그 몸에서 그 영혼이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고 몸은 흙에다가 묻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죽음은 인생학교의 졸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서 일정한 기간을 공부하면 졸업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6년을 마치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3년을 마치면 대학으로 진학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 학교로 진학합니다. 죽음은 병원을 퇴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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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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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국 프로에서 자기 최면을 거는 사람의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중년의 여인이었던 그는 양파를 사과라고, 겨자를 아이스크림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사과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혀 불편하지도, 괴롭지도 않게 말입니다. 의학에서는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짜약을 진짜라고 소개하여 환자에게 먹이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복용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치료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모두 믿음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믿음은 정말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치유의 사건과 기적들도 대부분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고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도 말씀하셨지요. 믿음이 없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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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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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마태복음 11:25-3019세기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천재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머리 속에 모든 지식을 넣어 주었으나, 믿음이 없었으므로 신앙교육은 시키지 않았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머리는 지식으로 차고 넘쳤으나 영혼은 한없이 굶주렸다. 나는 모든 장비를 갖추었으나 돛은 없이 허무와 무의미의 바다를 떠도는 배와 같았다.”희망과 꿈을 이끌어 줄 돛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저 밀려오는 허무의 파도 너머로 떠밀어 줄 돛이 필요합니다. 시인 루이스 플레처는 이렇게 노래합니다.“재출발의 땅이라 불리는 멋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입구에서 지난날의 실수와 아픔을 낡은 코트처럼 다 벗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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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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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심리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실험한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험의 내용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큰 어려움을 겪는 순간 주변에 있는 사람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도와주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실험에 의하면 그 사고현장에 사람이 많을수록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날 확율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아파트 앞에서 길을 가던 여인이 강도를 만나 비명을 질렀고 이를 본 사람들이 38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신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 여인은 살해되어 싸늘하게 죽어갔지요.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방관자효과라고 한답니다. 왜 그들이 도와주지 않냐구요? 이것은 특별히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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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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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힘들다, 힘들어, 정말 힘들다... 캄캄하다, 캄캄해, 앞날이 아주 캄캄하다... 망한다, 망해, 모두가 망해간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숨뿐이다. 직장을 잃거나 정들여 살던 집을 넘겨준 이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주식시장 거래량이 신경질적으로 오르내리고 이번 연말에도 장사가 너무너무 안 됐다며 울먹이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무슨 신통한 묘수가 없겠나? 정치가 잘못되어 경제가 망가졌으니 정치가를 갈아 치우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미국이 그 일을 제일 먼저 해냈다. 오바마를 당선시킴으로...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근원치료일까? 만약 그것이 정치 때문이라면 정치 잘 못한 나라에만 경제위기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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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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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요한복음 1:35-39“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주님은 구속사업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셨으나 오늘도 인간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쫓던 두 제자는 물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믿음의 문에 들어서는 인간이 예수님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와 보라!”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소개받고 어디 계신가 물었듯이 오늘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소개받으면 “그가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와 보라”고 대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웅장한 예배당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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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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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고 다시 1년간의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움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8년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내고 2009년의 달력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실 시간에 처음부터 하루, 일주일, 일년의 단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달의 주기, 태양의 주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시간 단위의 구별이 없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태초에 시작된 시간이 아무런 구분선이 없이 일직선상으로 계속되기만 한다면 그 과정 속에 있는 우리들에겐 지금과는 많이 다른 일들이 생겨나겠지요? 아마 나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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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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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성경에 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경지식이 꽤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 책은 그 길이가 25절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는 이 책을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기도 했습니다.그런데 이 빌레몬서를 두고 기독교를 조롱거리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의 옹호자라는 사실을 이 책이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만나 전도를 해서 예수 일꾼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는 자유시민인 빌레몬이 소유한 노예였습니다. 그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고 도망갔다가 붙잡혀서 투옥되었는데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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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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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미주성결대 명예총장)성경처럼 결혼의 뜻매김을 잘 한 사례가 또 어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결혼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창2:24). 결혼예비교육을 할 때마다, 그리고 가정과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이처럼 간단명료한 풀이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이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더라’는 성구가 나옵니다. 벌거벗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간관계는 바로 부부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것을 악용해서 나체주의자들이 벌거벗고 보아란 듯이 돌아다닙니다만 아무들 앞에서나 벌거벗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에서라도 강제로 벗겨 놓으면 그것은 중대한 인권침해가 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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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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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누가복음 2:16-21영국의 저술가 길버트 웨스트와, 명 판사 에드워드 리틀튼 경은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의심하는 정도를 넘어 공공연히 반대했습니다. “이 미친 놈의 종교를 세상에서 추방해버리자”고 큰소리쳤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의 허구성을 밝혀내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들은 각기 오랫동안 조사 연구를 한 후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진지하게 그리고 철저히 연구한 끝에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화를 전하는 글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던 두 사람은 믿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연구한 후 결국 기독교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심각하고 진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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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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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준비를 하면서 어떤 강사분을 모실까 머리를 맞대어 고민했습니다. 몇몇 분들이 거론되었지만 곧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고 그 밖의 다른 분들을 알아보기로 했지요. 처음에 거론된 분들이 워낙 교계에서 비중이 큰 분들이다보니 모시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우리 모임의 규모나 성격으로 볼 때 그런 계획을 세우는 것이 큰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분들은 우리 모임에 모시기에는 너무 큰 분, 우리는 그분들이 오시기에는 너무 작은 모임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어떤 강의나 시합을 위해서 외부인을 초청할 때 대상자가 너무 큰 분이어서 감히 모실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그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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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08.12.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