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50개 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날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1982년 1월 미국에 와서 2002년 1월까지 꼭 20년 살아 온 모든 것들을 정리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집 정리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쓰지도 않으면서 구석구석 쌓아 놓았던 물건들과 입지도 않으면서 걸어 놓았던 옷들을 보면서 욕심껏 움켜쥐고 살아온 나의
1998년, 전도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기쁨이 충만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LA에서만 전도하지 말고 미국 50개 주를 향해 떠나라는 음성을 듣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부부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전도에 대한 동일한 부담감을 주시고 열정도 주셔서 그 어느 곳이든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달려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LA 공항에서 전도할 때,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는 40대 여자분에게 어느 곳으로 가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공항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인 팜 데일로 간다고 하여 우리가 모셔 드리겠다고 하니 고마워하였습니다. 조
남편은 핸디맨으로 막노동을 하면서도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일하면서 그 집 주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시간이 부족할 때는 저를 오라고 불러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전도 생활이 신나서 기쁨으로 계속하였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을 전도의 기회로 삼아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집 근처에 있는 대학교 교정으로 가서 전도했을 때
간암 선고를 받은 후, 남편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라고 묵상했을 때, 하나님의 소원이 전도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장에 전도를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많았습니다. 그 동안 병고에 시달리느라 나의 몸무게는 90파운드밖에 나가지 않아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암에 걸린 몸으로 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지난날에 지었던 모든 죄 즉 우상 숭배 했던 죄와 나의 못된 죄성과 못된 습관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잃어 버렸던 첫사랑을 회복한 후, 그때의 감격을 소유하게 된 나의 심령에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말씀을 부어 주셨습니다.“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병든 몸이지만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야 했기에, 미련 없이 샌디에이고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땅에선 고아와 같은 우리 가족을 주 안에서 믿음으로 사랑하는 형제들이 아쉬워하면서 멀고 먼 엘에이까지 따라와서 이삿짐을 옮겨 주었습니다. 형제들의 뜨거운 사랑 속에서 승리를 끝까지 붙잡을 것을 눈물로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엘에이 북쪽 노스리지(Nor
영주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민국에 고발하겠다는 위협을 받으니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고통스러웠지만 기도만 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그동안 영적 체험은 많이 했지만,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해서 환경으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감으로 고통스러웠을 때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출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홍해를 건너야만 했듯이, 우리 네 식구가 우상이 들끓는 집안을 떠나서 참으로 형용키 어려운 감동으로 가방 몇 개 달랑 들고 돈도 없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한 때는 1982년 1월 5일이었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옛날의 출애굽 사건처럼 미국 땅으로 급하게 인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려고 서있을 때 앞에 있던 누추한 그 남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어느새 예쁘고 늘씬한 여자가 그 남자 대신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여행사에서 일찍 나와서 대리로 줄을 서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사무적이고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하던 대사관 직원의 마음을 그 여자는 애교를 부리면서 호탕하게 웃도록
1981년 12월 3일, 미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는데, 유학생으로 미국에 갈 수 있는 I-20 Form이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고 생각하니 그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분이 우리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보내준 서류였습니다.학교 등록일은 1982년 1월 10일, 어떻게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모든 일
기도원에서 성령 체험을 하고 돌아온 날부터 무릎을 끓고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밤 9시만 되면 두 아들을 재워놓고 교회로 달려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한밤중에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지고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어떤 시커먼 물체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다가 시커먼 보자기로 덮어씌우려고 하
여의도 광장에서 서원은 했지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9월 중순에 난생 처음 기도원이란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간 곳은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이었습니다.그 기도원은 우리 교회 분위기와 너무 달라서 놀랐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천막으로 된 성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지각색으로 우는 사람, 춤추는 사람,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한 지 8개월이 된 1980년 8월, 여의도 광장에서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나는 찾았네 새 생명”이란 제목으로 C.C.C 선교회에서 주최하며 김준곤 목사님이 대회장으로 진행된 큰 선교대회였습니다.5일 동안 세계 각처에서 선교사님과 성도 100만 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남편은 목사님의 추천으로 낮에는 서울 고등학교에 모여 각 교회
우리 부부는 모두 불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해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결혼해서도 불상 앞에서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면서 세상의 부를 좇아서 열심히 살았습니다.1969년 8월에 첫아들을 낳고부터 시작된 집안의 우환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이 열 살이 될 때까지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큰아들은 하루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