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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교의 교장 (2)1933년 3월까지 721명이 졸업을 하였으며 첫 졸업생들은 1919년에 졸업증서를 받았다.연희전문학교는 1927년 본관 앞뜰 중앙에 언더우드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 동상은 2차 세계대전에 사용할 금속으로 일본인들이 가져갔고, 1948년 다시 건립되었으나 1950년 한국 동란시 대학건물이 전쟁으로 파손되었을 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 동상은 그 위치에 세 번째로 건립된 것이다.입구에서 본관 안뜰로 연결되는 돌 계단은 뉴욕에 있는 한국 교포들의 기증으로 만들어졌다. 대학 임원과 학생들은 에비슨 도서관 기금으로 $500을 모금했다. 독실한 감리교 신도인 윤치호씨는 2차 대전 동안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중요한 장서를 기증했고, 도서관 기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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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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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교의 교장 (2)네번째 전문학교인 조선 기독교 전문학교가 1915년 3월 15일에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 대학교는 John D. Wells School(경신학교 대학부)라는 명칭으로 발족되어 고등교육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당국에서도 더욱 적절한 인가를 받을 동안 이 명칭을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1915년 4월 초에 60명의 학생으로 연희전문학교는 YMCA에서 교실을 빌려 학교문을 열었다. 언더우드 박사가 설립자였고, 초대 교장이었다. 그는 1885년 4월 5일 한국에 도착한 이후 30년 동안 경이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그는 선교사업, 의학, 복음 전도, 교육, 문화 및 성경 번역 등 그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일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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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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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의학교 (5)에비슨이 한국에서는 우유를 전혀 안 쓰느냐고 물었더니, 우유는 궁중에서만 사용되고 궁중에서만 쓰기 위하여 평민들은 못쓰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통 우유의 사용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또 환자들이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정된 통 우유가 수입되었지만 약으로만 사용되었지 식료품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약은 맛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에, 우유는 맛이 좋지 않지만 약이기에 하는 수 없이 먹었다. 값이 비싼 데 대해서도 모든 수입 약품이 비싸기 때문에, 수입한 우유값도 비싼 것으로 알려졌다.우유 수요가 늘어서 목장이 필요하게 된 것은 그 후 오래 지나서였다. 목장 우유가 나오자 우유 소독을 해야 했고, 소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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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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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세브란스 의학교 (4)앞에서 언급한 홍석후씨는 한말의 관립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교육과정이 일본말로 된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고작이었고, 임상실습은 물론 기초 의학 실습을 전혀 받지 못하여 졸업생들은 질병에 대한 실제 지식이나 치료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그 무렵, 제중원에서는 몇 사람의 젊은이에게 보다 실질적인 의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관립 의학교 1회 졸업생 중 2명은 관립 의학교에서 책으로만 공부한 것으로는 병의 진단이나 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제중원 의학교에 편입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얼마나 긴 연한이 걸리더라도 제중원의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같이 공부하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편입이 허가되었으며 이미 책으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진보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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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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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세브란스 의학교 (3)의사 교육과 병행하여 간호원 교육도 실시되었다. 제중원 운영이 선교부로 이관되었을 당시, 에비슨이 기생 간호원과 재정 낭비를 하는 관리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당시의 큰 난점은 한국에서는 관습상 여자가 남자 환자를 간호할 수 없다는 일이었다. 그래서 에비슨이 선교사 부인들을 병원에 데려다가 간호원 교육을 시도했던 것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미국서 파송된 선교 간호원들도 한국에 와 있는 다른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건강 유지가 어려워 사망하거나 사임하는 일이 잦았다. 제일 처음에 파송된 간호원인 애니 엘러즈는 곧 감리교 선교사 벙커씨와 결혼하여 간호원 일을 중단하였다.어려움을 무릅쓰고 의사와 간호원들은 남녀 간호원 교육을 위하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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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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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의학교 (2)일본이 정권과 학교교육을 탈취하고 일본말 교과서를 사용하게 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당시에는 이 책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사용된 교과서였다.에비슨은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교과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책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제일 먼저 한 것이 그레이의 해부학 책이었으나 처음 원고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번역을 해야만 했다.1902년에 베어드 목사 부인은 중등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래그의 식물학 책과 고등 식물학 책을 번역하였다. 여의사 에바 필드는 생리학 책을 편찬하였고, 평양에 있던 웰즈는 모집한 학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기록하여 무기화학, 약물학, 해부학, 치료학, 위생학 등 여러 책을 편찬하고 있었다. 에비슨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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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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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세브란스 의학교의학교육의 시초를 따져 보려면, 아마도 좋게 말하기 위해서이겠지만, 언더우드 목사가 알렌이 시작한 병원 일에 가담한 직후인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독자는 다시 한번 상기하여 주기를 바란다. 그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완전한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의사를 보조해 줄 수 있는 조수 양성을 하기 위한 극히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것에 불과했다. 출발은 비록 그 정도밖에 안 되었으나 그것이 시작임에는 틀림없었다.스크랜톤씨도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몇 명의 유망한 젊은이들로부터 요청을 받았다. 그 당시 한국말로 된 교과서가 없어서 의학공부를 하려면 영어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아펜젤러가 막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영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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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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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3)그 수표는 아주 적시에 보내진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남대문 밖 바로 지금의 서울역 건너편에, 아직까지 보아온 중에서 가장 좋은 대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902년에 그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그 대금의 일부는 옛날 구리개에서 사용하던 건물에 대하여 정부로부터 보상받은 돈으로 지불하였다.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딱 $10,000짜리 병원을 건축한다고 확정짓지 않았기 때문에 시일이 좀더 연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그마한 병원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의논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새로 임명된 선교부 총무인 아더 제이 브라운씨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평양까지 기차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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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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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 (2)‘이튿날 아침, 나는 쉐넥타디 기차 노조의 부회장인 월터 피트킨씨의 집에 초대되어 환대를 받았다. 피트킨씨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양친이 서부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의 사업에 대해 물었고, 나는 그에게 현재의 상황과 새 병원의 건립을 위한 모금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는 나의 계획을 보고자 하였고, 그 계획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였다. 큰 사업가들에 있어, 질문하는 것은 재미있는 소일거리로 보였다. 마침내 그는 나의 계획에 찬동하였고, 모든 공간이 빈틈없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본론으로 병원건립을 위하여 $500을 기증하겠다고 하였다.’‘첫번째로 내가 받은 선물은 건축설계도였고, 두번째는 $5의 헌금이었으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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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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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현대식 병원 설계도 (2)‘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한 선교사 친구(최근 청주에서 선교를 시작한) 에프 에스 밀러 목사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병중의 그의 아내와 함께 미국에 왔으며, 그는 선교본부에 가서 그들을 방문하여, 제출된 병원 건립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고 했다. 밀러 목사는 병원을 건립하는 데 경비가 얼마나 필요하며, 선교본부가 기꺼이 동의를 표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설명하였다고 했다. 그러자 엘린우드씨는 에비슨씨가 미국에서 재벌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모금하는 일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의아해 하면서 대답하였다는 것이었다.’‘이때가 1900년 봄이었다. 우리들은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선교회 본부가 뉴욕에서 외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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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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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세브란스 병원 (3)8월 초순, 질병이 유행하는 것을 알게 되자, 환자를 격리수용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에비슨은 최근에 도착한 웰즈 의사에게 언더우드 부부와 함께 그곳에서 일하도록 명하였다. 그곳은 성밖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몇 개의 안락하고 따뜻한 방들이 있었다. 그곳은 크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빨리 치유되거나 또는 곧 사망하였으므로 그들은 많은 환자를 보살필 수 있었다.언더우드씨는 많은 한국인 간호자들을 정리하였고, 모든 선교사들은 이미 방역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 언더우드씨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러한 일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콜레라는 당시 아주 무서운 병이었으므로 혐오감 없이 이 불쌍하고 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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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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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세브란스 병원 (2)그 이전에도 콜레라는 때때로 한국을 침범한 적이 있었으며, 많이 죽는데다 예방이나 치료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레라는 사람이 왕래하는 속도 이상으로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 전염되기 전에 손을 쓸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매일 북부지방으로부터 이 병의 새 환자 발생에 대한 보고가 여행자들을 통해서 들어왔다.한국사람들은 누구나 콜레라가 쥐 귀신이 체내로 들어옴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들은 이 병이 쥐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쥐의 발을 통해서 체내로 들어와서 다리로 올라가서 내장에 들어가 괴롭힌다고 믿었다. 이들은, 다리 근육의 경련이 쥐 귀신의 침입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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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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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백정 박성춘 이야기 (3)박씨는 후에 은행가가 되었고, 그 종교적 열성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여러 번 장로 후보에 오르내렸으나, 나이 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문제가 되어서 연기되곤 했다. 그는 믿기 시작한 지 21년 후에 드디어 시내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다. 에비슨은 그가 장로로 임명되는 예식에 참석하여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드릴 때, 맨처음 그를 찾아가 치료해 주었을 때부터 그 이후로 일어난 모든 일들을 회상했다.백정의 아들(박서양)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박씨에게 서양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모든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결혼해서 상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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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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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백정 박성춘 이야기 (2)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악했다면 다음 번에는 동물, 즉 소나 돼지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태어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동물이든지 사람의 조상의 변신일 거라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며, 그것은 사람의 조상을 죽이는 위험을 범한다는 뜻이었다. 우스운 것은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을 잡아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엄격한 불교 신자들은 채식주의자이겠지만 먹기는 하면서 동물을 죽이는 사람만을 두말할 것도 없이 천민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그 당시에는 상투를 틀고 다니는 사람과 갓(말 꼬리 털로 만든 모자)을 쓰고 있는 사람의 두가지 남성의 구별이 있었는데, 백정은 갓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어린이들일지라도 백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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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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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죽이는) 약 (2)우물은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시내에 산재해 있는 좁은 길 바로 가까이에 있었는데, 길 옆에는 집에서 나오는 하숫물이 흐르는 하천 구덩이가 파져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우물들은 이 하수구와 너무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염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물은 주위에 돌을 쌓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돌 사이의 틈으로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자유롭게 스며들어올 수 있었다. 이러한 우물이 설사나 이질 등의 위장 질환을 퍼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지방이나 마을의 우물이 다 이런 우물과 비슷했기 때문에 질병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높은 사망률을 초래했다.물론 사람들의 질병 예방을 돕는 좋은 풍습도 다소나마 있었다. 그것은 냉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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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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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장날 (전도) 3에비슨은 이렇게 이야기한다.‘나는 왕립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준(準) 정부고관으로서의 대우를 받았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마가 배당되기도 했다. 그것은 네 사람이 드는 가마인데 가마꾼은 보통 가마꾼과 다르게 보이도록 특별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 하인들은 너무나 잘 훈련되어 있어서, 가마 앞의 두 사람과 뒤의 두 사람은 한 줄로 서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가마를 메고 길을 걸을 때는 돌길, 웅덩이, 좁은 다리 등 거친 길을 계속 민감하게 파악해야만 했다. 그런 위험한 지점에서는 뒤에 따라오는 사람에게 경고해 주는 것이 앞에 있는 사람들의 의무였다. 아주 흔히 소리치는 말은 “조심하여라, 개천이요.”라는 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가마를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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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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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장날 (전도) 2‘우리들이 일주일씩이나 자리를 비웠다가 진료소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에 기분 좋지 않은 놀라운 일이 있었다. 내가 수술실로 사용하려고 작정해 놓은 방들을 일본인 의사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일이었다. 관리들이 돈을 많이 받고 그 방들을 빌려준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수술실 같은 성가신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이 조용히 끝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관해서 하루종일 생각했다. 내가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일을 했으니까 왕이 약속한 돈의 반은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도, 반의 반밖에는 받지를 못했다. 이래저래 이 병원의 장래의 발전이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방해를 받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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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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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에서 (2)에비슨은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내가 진료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환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관리들 중에서 한 명의 통역관을 뽑아서 나를 돕게 했다. 그가 영어를 꽤 잘해서 나는 비교적 쉽게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소위 한국사람이 말하는 상류사회 출신인 양반이었다. 양반은 부자건 가난하건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스스로 일하는 계급보다 높다고 생각하였다. 통역관은 하류 계급의 환자들에게 거만한 말투로 호령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도 그런 말투에 익숙해 있어서 별로 언짢아 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점이 못마땅하게 생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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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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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필 목사 (사랑의 교회, CO) 제중원에서에비슨이 서울에서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은, 늘 들어왔고 또 그곳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던 병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아주 실망하고 말았다. 물론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받고 왔는데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건물은 전부 한국식 집이었고, 그 속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라야 고작 약국 정도의 일뿐이었다.그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서울에서 병원 업무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아니다로 의견이 대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선교하는 데 있어 병원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병원선교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선교단이 왕립병원과의 관계를 계속 맺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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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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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2)에비슨 가족은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8월 말까지 베어드씨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어서 서울로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까지의 여행은 배를 타고(당시에 철도가 없었다.) 부산항을 출발하여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인천)으로 가는 것이었다. 배에서 그는 뜻밖에도 서울로 가던 호레스 엔 알렌 의사를 만났다. 알렌씨는 고종 황제가 미국 시카고 콜럼비아 세계 박람회에 보낸 한국 사절단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언더우드씨는 제물포항에서 이들을 맞아 서울로 안내했다. 제물포에서는 자칭 이 디 스튜워드라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묵었다. 그 중국인은 오랜 세월 동안 태평양 선박에서 안내원(steward)으로 일했으며, 그가 그 일을 그만두고 호텔 지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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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저널
2011.01.3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