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패러독스의 종교라고 합니다. 패러독스를 우리말로 역설이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 파라독소스(paradoxos)는 “의견이나 기대에 어긋난다.” 또는 “기이하고 놀랍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기독교는 상식적인 의견이나 상투적인 기대와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종교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세 가지 역설적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 되신 성육신(成肉身) 사건이요, 둘째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 사건이요, 셋째는 그리스도가 죽었으나 다시 사신 부활 사건입니다.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
포도원 주인이 포도 동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열매철이 되어도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습니다. 3년째에는 큰 기대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열매는 없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호령했습니다. “저 열매 못 맺는 무화과나무 당장 찍어 버려라.” 포도원 지기가 간청했습니다.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다음 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는 찍어 버리겠습니다.”이 비유를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포도원은 이 세상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 지기는 성령님이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포도
절벽에 핀 꽃을 따서 애인에게 던져준 젊은이가 물에 빠져 떠내려가며 외쳤습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가곡 “물망초(Forget me not.)”에 얽힌 슬픈 전설입니다. 여인은 일평생 강물에 흘러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슬퍼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죽은 자의 비극보다 산 자의 생애가 더 애절합니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옵니다. 묵은해의 실패를 새해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공과 축복의 새해를 맞는 비결은 무엇입니까?슬프고 괴로운 일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속담대로 사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계절이면 2천 년 전 어느 아침 갈릴리 호숫가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고깃배 한 척이 포구에 들어옵니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부의 표정은 피곤과 실망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밤새 고생했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빈 배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이것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의 고기잡이를 마치고 닻을 내린 우리는 얼마나 소득이 있었습니까? 텅 비어 있는 배를 끌고 지친 모습으로 송구영신의 포구에 돌아온 것은 아닙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 2:2).“그리스도는 어디 있는가?” 이것은 동방박사들만의 질문은 아닙니다. 헤롯왕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헤롯왕이 물었습니다. 헤롯왕은 메시아를 찾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을 잡아 없애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세상 왕들의 정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헤롯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적으로 간주합니다.“그가 어디 있는가?” 현대의 헤롯들도 여전히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영향력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곧 함께 사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함께 사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업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미국에 온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학문을 닦아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상투를 맞잡고 싸우는 조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고려인삼 장사꾼들이 구역 다툼 끝에 난투극을 벌인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탄식했습니다. “이래서야
사랑과 이해, 용서와 화해로 함께 사는 삶에는 값진 보상이 따릅니다. 시편 133편은 바로 함께 사는 삶의 축복을 가장 아름답고 확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이 시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 왕의 아들들이 왕권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서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자녀들 간의 불화와 분쟁의 추악함과 쓰라림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의 우애와 화목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것은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불화와 분쟁은 저주의 씨앗이요, 우애와 화목이야말로 축복의 원천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함께 사는 삶의 축복은
금년은 조국 광복 7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애국선열들의 투쟁으로 36년 만에 일제의 속박에서 풀려난 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굴복하여 변절한 지도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한편 광복의 기쁨도 잠시뿐, 국토는 양단되고, 민족은 대립하여 서로 물고 찢다가 마침내 동족상잔으로 자유와 독립과 해방의 빛은 꺼지고 민족 역사는 다시 검은 구름에 휩싸였습니다.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 70년이 되었으나, 통일의 징조는 여전히 감감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 북한은 경제 파
7월 4일은 미합중국 독립 기념일입니다. 독립 선언서가 공식으로 채택된 것은 1776년 7월 4일이지만 식민지 의회가 미국의 독립을 결의한 것은 그보다 이틀 전인 7월 2일이었습니다. 뉴욕 주 대표의 불참으로 13개 주 중 12개 주 대표가 만장일치로 독립을 결의한 것입니다. 그 후 이틀간 긴 토론을 거쳐 7월 4일에 미국 독립 선언서가 역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그러나 미국의 독립은 식민지 의회의 결의와 독립 선언서의 공포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독립 선언이 실제로는 독립 전쟁의 선포였습니다. 막강한 영국 군대와 맞서 6
시편 147편은 열정과 기쁨과 감격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찬양 시입니다. 형식적 찬양이 아니라 찬양의 구체적인 이유를 16가지나 나열하고 있습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심”에서부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심”까지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찬양의 이유입니다.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해 본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뜨겁게 감사 찬양을 해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형식과 습관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많은 사람이 조용히 즐기는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유대인들이 쉐마라고 부르는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2천 년 유랑의 역사 속에서도 유대 민족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결속시키고 지탱케 해준 놀라운 힘이었습니다.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베풀고 있는 종교적 신앙 훈련은 얼마나 열매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보다 의미 있고 효과적인 신앙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까? 물론 왕도에 해당하는
예수님이 성을 내셨습니다. 뜻밖입니다. 야고보서는 “성내기를 더디하라”고 했습니다(약 1:19). 전도서는 경고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고 했습니다.교부 제롬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노하지 않으시는 것이 가장 큰 분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분노하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
예수님은 사람들이 의식주를 염려하는 것을 아셨습니다(마 6:25-31). 의식주를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내란과 테러로 수많은 살상이 일어나고 있고, 전염병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사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경찰서에 가서 자살한 교포가 있었습니다. 존속 살인, 배우자 살인사건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 불황과 실업 때문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갈등이 격화되
신앙생활은 새로 태어난 인생의 설레는 모험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새해에 출발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멋진 모험이 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54:2). 이스라엘이 부흥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비전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눈 입니다. 히브리 11장은 믿음의 비전을 가진 위인들을 소개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보았고 복종했습니다. 신앙의 모험에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하나님 사이즈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빌립보서 2장 13절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도 개인의 심령과, 공동체인 교회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목석같이 무심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며 착한 일을 하십니다."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바울 사도의 말입니다.
길을 가던 구레네 시몬이 구원의 드라마 한복판으로 끌려나와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경험으로 시몬의 삶이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지친 몸을 쉬게 해드렸고 갈보리로 올라가 마침내 참 생명의 근원에 이르렀습니다. 시골 신사 구레네 시몬시몬은 신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후손인 시몬은 고국에 돌아와 예루살렘 근처 농촌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건장하고 힘센 농부였습니다. 시몬은 볼일이 있어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십자가 행렬을 따라가는 무리와는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몰린 시
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이해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됨을 이해하십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예수님은 다 큰 어른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여인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인자(人子)”라는 말이 스물 세 차례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시므로 사람인 우리를 이해하시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 말씀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마리아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을 보면 친척집인 듯합니다(2:5).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준비가 미흡했던 것입니다. 잔치 음식이 모자란다는 것은 난처한 일입니다. 잔치가 형편없었다는 입소문이 나돌 것입니다. 모자라기만 한 세상에서 주님은 생명의 풍성이십니다.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표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주님은 잔칫집에 기쁨을 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성적 성품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27 말씀에서 단서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다양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믿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성의 원형으로 보고 신격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성의 구체적 본보기를 성경에서 보여 주십니다.어미닭과 같은 하나님(눅 13:34)예수님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예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시련과 고난은 누구나 만나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불치병이 닥칩니다. 경제난이 엄습합니다. 불화가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인생길에 치명적 사고도 발생합니다. 모든 희망이 꺼져 버리는 막다른 골목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고난이 올 때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시련을 만나면 참고 바라며 신앙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낙담 끝에 신앙을 버리거나 증오와 냉소로 신앙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어떻게 싸웁니까? 야단법석하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