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밥은 물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흘을 견뎠다. 방언에 대한 열망이 공복의 괴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택 옆 수돗가로 달려가서 펌프 물을 길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젠 다 글렀구나! 방언을 받기 전에는 물도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9.26 00:00
-
오고 있는 나라(2) 인적은 끊어졌지만 기도원 주변은 여전히 예전의 풍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프로스트의 신비스런 저녁 숲처럼 깊고 어둡고 사랑스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그처럼 가고 싶어 했던 고요한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호수처럼 평화스럽게, 세상사 알 바 없이 즐겁게 지저귀는 가슴 붉은 라빈 새와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9.19 00:00
-
천사의 이름(2)그 아기가 어느 날 하나님에게 물었다.“하나님, 하나님께서 내일 저를 지상으로 내려 보내실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작고 무능한 아기로 태어나서 저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러시는 거예요?”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그래서 너를 위해 천사를 한 명 준비해 두었지. 그 천사가 널 돌봐줄 거란다. 네가 걸음 걷는 법과 말하는 법, 노래하는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9.12 00:00
-
귀향(2)당신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또 무언가를 기대할 것 같아서 말없이 떠나왔습니다. 심한 열병이었습니다. 백일몽을 꾼 것일까요. 워싱턴에서 만난 당신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은 아침빛처럼 뚜렷하고 기치를 벌인 군대처럼 위엄 있는 술람미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에게 더 끌린 것은 그 아름다움 이면에 깔린 절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표정은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8.29 00:00
-
하늘 양식(2)댄딜라이언(dandelion)이라 불리는 민들레는 대가족이 한 곳에 모여 살고 있었다. 식용으로 쓰는 난쟁이 잎새와 샛노란 청춘의 두상화, 일편단심 한 자리에 깊숙이 뿌리내린 할아버지 민들레, 그리고 후손을 퍼트리기 위하여 하얀 솜털종자를 싣고 두둥실 떠다니는 할머니 민들레 등...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 되고 식용할 수 있는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8.15 00:00
-
하늘 양식(1)드디어 지훈은 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 의료인 노릇을 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훈의 꿈은 따로 있었다. 병원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나 양로원, 요양원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진료 봉사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아픈 정민 모자를 돌보는 일도 그 사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난번 교회 안에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8.02 00:00
-
예기치 않은 일(3)두어 시간 지났을까. 차임벨 소리가 나서 커튼 사이로 보니, 그가 문밖에 서 있었다. 한 팔에 재킷을 접어들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넥타이는 반듯하게 그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내가 문 열기를 망설이자 그는 한 번 더 벨을 눌렀다. “잠깐 들어가겠습니다.”그가 문밖에 서서 말했다. 나는 말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패스트푸드점 손님들이 신고는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7.25 00:00
-
예기치 않은 일(2)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지금 저보고 짐승의 표를 받으라고요? 그게 목회자 입장에서 할 소린가요?”내가 침묵을 깨고 매섭게 응수하자 그는 설득조로 말했다.“왜 자꾸 짐승의 표라고 하십니까? 그냥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시스템에 순응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텐데요.”“짐승의 표가 아니면 뭘까요? 목사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7.18 00:00
-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2)새삼 그를 향한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크리스의 두 번째 실종과 정민의 발작으로 어수선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남편과 하늘천군만마의 현현이었다. 크리스와 정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러 온 것일까? 아니면 장차 올 시험의 날에 대적할 힘과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해 꿈길로 걸어왔을까? 하늘군대를 동원한 남편의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7.12 00:00
-
잿빛 날개의 천사(2)“왜들 그래? 왜 모두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정말 칼을 든 천사가 거기 있었단 말이야. 모두 죽여 버린대. 오빠도, 목사님도 모두...!”그러면서 정민이 갑자기 깔깔대기 시작했다. 그러한 정민을 나는 부둥켜안았다. 정민의 어깨는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이 가녀린 몸으로 그 큰 절망과 맞서다니! 찝찔한 눈물이 내 볼을 적시며 흘러내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6.27 00:00
-
침묵(2)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녘처럼, 짐승정부가 점령한 세상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순교자의 머리가 잘리고 붉은 선혈이 공중으로 튀어도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고, 새들은 즐겁게 노래한다. 배교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6.20 00:00
-
투혼(2)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동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급한 마음에 나는 애꿎은 지훈의 키 넘버를 자꾸 눌러댔다. 지훈의 핸드폰은 여전히 먹통이다. 잠이 깼는지 아기 방에서 자지러지게 울어 젖히는 휴를 안고 나오는데 드디어 내 핸드폰이 울렸다. 왜 자꾸 전화질이냐는 지훈의 짜증스런 음성이 대뜸 흘러나왔다. 병원에서 아이디가 없는 사람은 받아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6.14 00:00
-
막다른 골목에서(2)“닥터 조는 어떨까요?”정민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역시 광야교회 집사로서 개인 클리닉을 가지고 있는 패밀리 닥터인데 이민촌 환자들 사이에서 오진을 잘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그의 핸드폰 넘버를 눌렀다. 엔슬링이 나왔다. 환자를 진찰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동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6.07 00:00
-
휴거동이들(2)성경을 읽다가 의문스런 구절이 있으면 내게 묻는다.“환난시기가 지나면 뭐가 오지, 누나?”“천년왕국이 오겠지.”“그 다음엔?”“마지막 전쟁이 벌어지겠지. 천 년 동안 결박되었던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풀려나서 다시 세상을 속이고 미혹하겠지.”“그런 다음?”“최후의 백보좌 심판이 있을 거야.”“그리고?”“새 하늘과 새 땅이...”“그 담엔?”나는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5.24 00:00
-
빨래터 이야기(2)그는 세탁소를 떠나는 자리에서 말했다. “아내와 약속했지요. 앞으로 신구약성경을 함께 연구해 보자고. 아내가 메시아닉 쥬이스(jewess)거든요. 선택 받지는 못했지만…….”그렇게 말하며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나는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그 거침없고 쾌적한 삶에 그림자를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5.17 00:00
-
빨래터 이야기(1)모처럼 가게로 정식 출근했다. 휴거 이후 두어 번 들여다보고 오랜만에 제대로 문을 열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몰 안에만도 ‘임시휴업’이라고 써 붙인 가게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탁소는 좀 예민한 직종이긴 하다. 천지가 개벽해도 사람은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회사에 출근을 해야 하고 아울러서 세탁소에 맡겨놓은 캐주얼과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5.09 00:00
-
예루살렘의 노을(2)지난날 남편은 단독이민목회를 하면서 한국에서 갓 건너온 교인들의 신분문제와 일자리 등을 해결해 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민자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신분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곧 주변의 큰 교회로 적을 옮겼다. 작은 교회는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들 하시네요! 당신은 분하지도 않으세요?” 떠나간 교인들에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5.02 00:00
-
지성에서 영성으로 신앙 안으로 투항한 동생과 함께 참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고, 전화를 걸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훈에겐 내가 필요했다. 지훈은 이제 갓 태어난 믿음의 어린양이니까. 우리는 늦은 저녁을 대충 챙겨먹고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조용히 묵상하며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도우심을 구했다. 우리는 오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4.25 00:00
-
악마의 코드 666(2)그때였다. “아이구, 우리 이 박사 왔구나!”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스탠드 위, 사진 속의 어머니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짧은 은발이 흔들리는 듯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이 박사라고 불렀다. 칭찬인지 흉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하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진짜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4.18 00:00
-
남은 교회(2) 그때였다.“잠깐만!”누군가가 설교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돌아보니 병원 일로 집회에 늦게 참석한 지훈이 예배석 맨 뒷좌석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지훈은 오만한 자세를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설교단에 서 있는 오랜 친구를 응시했다. “말씀하십시오. 닥터 리.”설교자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비록 그들은 서로 절
소설
이신혜 사모
2012.04.1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