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해질 무렵, 아버지는 키가 훌쩍 크고 인상이 온화한 벽안의 선교사 한 분을 집안으로 모시고 왔다. 장로교총회에서 파견한 선교사였다. 당시 장로교총회에서는 그 산하에 있는 농어촌교회들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일일부흥회와 시찰을 겸한 특수사역이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마을의 지주요 교회 수석장로 가정인 우리 집에서 손님 대접을 했고, 손님이 하룻밤 묵을 방과 식사 대접 준비를 하느라 어머니의 일거리가 가중되었다.

파란 눈에 코 크고 키 큰 이상한(?) 사람이 왔다는 소문에 온 동네 조무래기들이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마당이 고만고만한 또래의 코흘리개들로 가득 찼다. 호기심에 빛나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연신 입으로 흘러내리는 누런 콧물을 닦아내느라 소맷부리가 반질반질해진 꼬마들. 그런 조무래기들을 향해 선교사가 어머니께 물었다.

“오우, 칩사님! 이 아해들, 모두 칩사님 아해들입니까?”
그때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말없음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을까. 벽안의 선교사는 감탄의 소리를 연발했다.
“오우, 좋습니다. 모두 주님이 주신 아해들이니 천국의 아해들로 자알 키우십세다!”

아이들 틈에 끼어 있던 나와 동생은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선교사의 말을 부정도 긍정도 않고 그냥 웃고 서있는 애매한 어머니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고 원망스러웠다.
“빨리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하란 말이야!”

내가 어머니 옆으로 가서 다그쳤지만, 어머니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이었다.
“어떠니 얘, 나는 듣기 좋기만 하다만...”
“좋기는 뭐가 좋아! 창피하단 말이야!”

어머니에게 심통을 부리는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선교사님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그분의 깊고 푸른 눈이 내게로 향했다. 그 눈빛에 약간 익살스런 미소가 스며 있었다.
“학생, 일흠이 무엇입네까?”
“...”
“일흠 읍쓰?”

주변의 코찔찔이 악동들이 킥킥거렸다.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그의 익살스런 미소가 햇살처럼 밝은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우리는 추님 안에서 다아 현제차매입네타!"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거봐라. 선교사님은 벌써 다 알고 계시잖아. 얘네들 모두 동네아이들이라는 것을 말이야...”
“엄마가 말하지 않는데 선교사님이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선교사님이지. 심통 부리지 말고 애들 모두 예배당으로 데리고 가거라.”

결국 어머니의 많은 아이들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아이들을 집밖으로 몰아냈다. 그날 저녁시골교회는 환등기 보여준다고 데려다 놓은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로 야시장처럼 들썩였다. 야소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집안어른들도 그날만은 교회 주변을 기웃거렸으니까.

“추님, 우리 죄 위하여 십짱에 돌아가셨습네다!”
그분이 십장(?)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외치며 두 팔을 벌리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마치 패션쇼 야외극장이 있던 아칸소 주의 ‘유리카스프링’ 푸른 언덕에 서있던 대형 예수상을 연상케 했다.

드디어 시청각재료로 준비해 온 환등기 순서가 되었다. 벽에 설치한 하얀 전광판에는 유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동네 꼬마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도 성지의 이색적인 풍경이 입력되었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 사역지로 삼았던 유대 지방의 크고 작은 마을과 예루살렘, 그리고 복음사역의 중심지였던 갈릴리의 풍경이 선교사님의 설명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땅 위의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슴푸레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곱게 단장하고 공중으로 내려온다는 영원한 도시 새 예루살렘에 대한 꿈을 그렇게 심어 주었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고국을 떠나 당시 가난의 나라, 전쟁의 나라로 불리며 아직도 냉전 중이던 한국에 와서 스스로 십자가의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 콩나물 무침과 총각김치를 좋아하시던 그분.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잃지 않으시던 그분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구의령 선교사님이라고 했던가?) 어머니와 내게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유년의 내게는 이 춥고 어두운 삶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는 태평양 너머 대륙에 대한 꿈을,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 다 지난 후 다가올 미래의 왕국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이 세상에는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이 땅 위의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삶을 벗어나 빛과 사랑만이 존재하는 나라,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나라, 그 나라를 소망하고 있다.
그곳, 새 예루살렘. 내 어머니 가신 곳, 내 어머니 계신 나라를...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