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교수였던 하비 콕스는 『세속도시』라는 책을 쓰면서 현대사회가 세속화되어서 종교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비 콕스의 예견과는 달리 1980년대부터 오히려 종교가 부흥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인구는 줄었지만 컬트와 같은 유사 종교집단은 더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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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합리적인 이성보다 개인의 감성과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서구사회에서 종교가 쇠퇴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전통적인 기독교에 식상한 사람들이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동양 종교의 신비를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브리태니커 2008년 연감』에 따르면, 전 세계 무종교인의 비율은 11.7%, 무신론자는 2.3%로, 14% 정도만 종교가 없습니다. 아시아는 무종교인과 무신론자의 비율이 각각 15.4%와 3.2%로 다른 대륙에 비해 높은 편이며, 한국은 무종교인의 비율이 훨씬 더 높습니다. 한국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무속을 믿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아시아 평균 무신론자 비율과 비슷할 것입니다. TV를 비롯한 언론 매체를 보면 우리 사회가 상당히 무신론적인 사회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바라고 꿈꾸는 것들의 실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은 허상이 아니며 실제로 그들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허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말입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과 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말입니다. 믿음 위에 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비전을 품게 되고, 이러한 비전이 성취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하나님 안에서 바라고 소망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증거는 확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인 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으면 내적인 확신이 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이러한 믿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적인 확신을 통해서 그 증거를 남깁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 없이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 잠이 듭니다. 내일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문제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일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일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없다면 편하게 잠들 수 있겠습니까? 불면증이나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도 믿음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믿음으로 압니다. 선물 때문에 그 사람의 사랑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믿음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증명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편집증에 걸리고 말 것입니다.

이는 몇 가지 예일 뿐입니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지 믿음이 있어야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초월적인 그 무엇인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어떤 믿음을 가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 주는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잘못되면 인생도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나 안산홍의 하나님의 교회와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를 통해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면 그야말로 인생을 망치기 때문에 믿음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건강한 도덕적인 믿음의 유산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참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 그리고 사람에 대한 희망 선포가 성경의 진리입니다. 인류 역사상 성경만큼 인간 해방에 관해 진지한 영감을 제공해 준 책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인류가 죄로 인해 짊어지고 있는 불안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에서 선포된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산 증거를 갖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미 존재한 것을 나중에 경험하는 것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나라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들 드렸다고 말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순종하며 방주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삶의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과감하게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때문에 존귀해진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의로워질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믿고 순종했더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고,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행동 역시 믿음을 통해 발휘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노아는 생명선인 방주를 지을 수 있었고,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믿음 말입니다.

요즘 많은 심리학 관련 책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그때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을 통해 알고 체험할 수 있으며,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그 소망이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갈 삶의 의미를 줍니다. 삶의 가치와 목적을 제공해 줍니다. 삶에 대한 궁극적인 희망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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