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가 얼마나 힘이 들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까. 얼마나 기가 막히고 절망적이면 죽을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은 마귀가 좋아하는 생각이지 하나님께서는 전혀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연약해져서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죽고 싶다. 지금 그냥 이대로 눈 딱 감고 죽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데려가시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교회 건축중이었는데 건축 비용이 바닥나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 같은 건물은 돈만 있으면 3,4개월이면 다 짓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3년씩이나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 건축을 하고 있었는데 성도들은 건축 헌금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고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를 떠나던 때였다.

우리는 집을 담보로 세컨드 모기지를 받아 교회에 건축 헌금을 냈지만, 건축을 진행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두 성도님 가정 역시 세컨드 모기지로 헌금하셨다. 우리 집이 교회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겉모양만 만들어진 채 건축이 중단된 교회 건물을 매일 보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건축에는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 교회 완공의 불가능을 얘기하며 떠나는 교인들 때문에 힘들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교회에 살다시피 하면서 인건비 절약을 한다고 온갖 일을 다하다가 병이 나서 고생하고 암 진단까지 받아 고통스러워 하는 남편을 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시부모님이 힘들었고, 모든 것이 다 힘들었다.

“김석원 목사가 1불에 땅 받았다고 자랑하더니 건축하다 그만두게 생겼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들었지만, 건축을 끝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생길까봐 더 겁이 났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잠들었다가 깨어난 곳이 천국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심지어 “여보, 이렇게 힘든 일 그만둡시다. 당신도 담임 목사 그만두고 이사갑시다”라는 말로 남편을 유혹(?)했다. 여러 번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눈을 크게 뜨고 “여보, 그래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으라고 하셔서 시작했으니, 담임목사를 그만두더라도 교회를 다 짓고 나서 그만둬야지”라고 말했다. 힘을 다해서 응원해도 힘들 텐데, 내가 그만두고 떠나자고 했을 때 남편은 얼마나 기가 막히고 힘이 들었을까. 나도 많이 울고 기도했지만 남편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눈물로 기도하며, 때로는 병으로 아픈 배를 움켜 쥐고 밤잠을 설쳤다. 그후 나는 한두 번 더 남편을 유혹했다. “담임목사 때려치우고 어디 멀리 이사갑시다. 이민 목회 같은 건 그만둡시다”. 그때마다 남편은 나를 달랬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으라고 하셨으니, 무슨 뜻이 있겠지. 그래도 지금까지 견디어 왔으니 조금만 더 참읍시다.” 하고 달랬다.

돌아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렇게 힘든 날들을 참고 견디게 하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해져서 남편을 유혹했을 때 남편이 넘어가지 않아서 너무 감사하다. 그때 그만두고 도망갔더라면 충현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 이후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 훈련 받고 떠난 디즈니 인턴들은 없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숙박 하면서 33기까지 왔다 간 LA KCCC의 스틴터들 (한국에서 LA에 와서 영어를 배우면서 사역 훈련을 하는 학생 선교사들), 21기까지 왔다 간 뉴욕의 스틴터들 , 그밖에 시카고나 아틀란타에서 왔다 간 스틴터들은 우리 교회에 오지 못했을 것이며, 김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라는 설교의 도전이나, 매일 전도하며 살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재정 관리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자는 나의 강의도 없었을 것이다. 2001년 건축 완공 이후 주일마다 다녀간 2,500여 명의 사람들도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가 이곳에서 담임목회를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힘든 날들을 주님의 은혜로 견디게 하셨음에 감사드린다. 이곳 올랜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었기에, 1991년부터 국제 CCC 본부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었고,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CCC에서 주관하는 단기 선교 프로젝트에 참석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27개국)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기도하게 된 것이니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감사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보다 훨씬 전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의 내게는 달콤하게 느껴지는 유혹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믿음도 약하고, 더욱이 사춘기여서 쉽게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우리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신 아버지가 십수 년만에 돌아오셨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그냥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신 때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는 돌아오신 아버지가 옛날 버릇을 그대로 다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엄마는 모진 핍박과 고통을 당하셨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통학도 해보고, 자취 생활도 해보았고, 가정 교사도 해보았다. 친구집에 잠시 얹혀 살기도 했고, 기숙사 생활도 하면서 힘겹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사고 싶은 학용품이나 생필품, 옷가지등을 구입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대로 견딜 만했지만, 교회에 다닌다고 아버지가 엄마를 핍박하고 학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찬비가 내리는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엄마 편을 들고 아버지한테 대들다가 맨발로 빗속에 쫓겨난 적도 있었고, 집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친구집이나 교회 집사님집에 (엄마 친구)에서 잘 때도 있었다.

그때는 사는 것이 매일 힘들고 벅차서 그냥 죽고 싶었다. 가엾은 엄마를 생각하면 더 괴롭고 슬펐다. 그 당시 전혜련씨의 책들을 읽었는데, 죽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을 부채질하는 내용들이었다. 사춘기니까 그런 생각에 더 쉽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갈 희망도 없고, 사는 것이 매일 힘들어서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수없이 빌려다가 읽었다. 그러면서 그 당시 수면제로 사용되던 세코날을 사서 복용했다. 한 번 약국에 가면 두 알밖에 안 파니까, 약국 이곳 저곳을 다니며 샀다.

어느날 밤, 늦게까지 고민하고 앉아 있다가 보통 때보다 몇 알 더 먹었다. 당연히 그 이튿날은 일어나지 못했고, 오후까지 비몽사몽인데 담임 선생님이 친구들을 앞세워서 내 자취집으로 오셨다. 죽고 싶은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그렇다고 죽으려고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셨고,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덕분 이었으리라. 담임 목사님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퇴원할 때 나를 시골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선생님은 내가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며칠 쉬고 오기를 바라셨지만,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을 보시고 나를 다시 자취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선생님은 그날 택시비를 꽤 많이 쓰셨을 것이다. 다행히 큰 이상 없이 건강을 회복했고 학교에 다시 다녔다. 담임 선생님께 장황한 훈계를 들었지만 정말 고마우신 분이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회복이 느렸을 것이다. 내가 나쁜 생각을 계속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탄 마귀는 점점 더 나를 유혹했을 것이고 사랑하는 우리 엄마의 가슴에 못박는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하나님이 주실 최고의 장학금도 당연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머리 숙여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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