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엄마가 큰 언니와 함께 휴스턴에 사실 때, 올랜도에 사는 막내딸네를 보러 오셔서 한 달 정도 머무신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거의 매일 밤 엄마에게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눈물겹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으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그중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일들도 있었다. 나는 엄마와 같이 기도하면서 엄마의 기도와 이야기들을 녹음했고,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들을 녹음하였다. 그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엄마가 천국에 가신 뒤에도 엄마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가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울기도하고, 끝까지 엄마가 믿음을 지키도록 도와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도 한다.

그중에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지금도 그때 그일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내 아들이 태어나지 못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태어나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중매쟁이를 통해서 혼사가 오갈 때부터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그 당시(약 70여 년 전)에는 신부가 신랑의 얼굴을 결혼식 전에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결혼식날이 되어서야 겨우 얼굴을 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결혼식날에 너무 긴장해서 신랑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고 하셨다. 시골 부농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과 다섯 명의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힘든 밭일이나 허드렛일을 배우지도 아니하였고, 수(繡) 놓고 바느질하면서 사셨다고 했다.

결혼 초기에는 시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딸들이 태어났을 때 분가했다. 층층시하에서 벗어나 남편과 딸 둘과 오붓하게 살게 되어 기뻤는데 그것도 잠깐, 남편은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했는데 항상 술에 취해서 곤드레 만드레, 집도 겨우 찾아오기 일쑤였다.

어느날은 화도 나고 속도 상해서 어디서 그런 술을 마시는지 알아 보려고 애기들을 재워 놓고 엄마는 집을 나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골 주막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날도 술집에서 여자들과 노닥거리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서 엄마는 잠자는 딸들이 걱정되어 집으로 가셨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엄마는 아버지에게 몇 번 얘기를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시집 와서 아들 하나 못 낳은 주제에 무슨 말이 많으냐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시곤 했다.
엄마는 무척이나 실망했다.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딸은 시집가면 출가 외인이라고 하여 친정에서는 딸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면 동네 사람 보기에 창피하다던 시절이었다. 실망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엄마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삶의 희망이 없어졌다. 얼굴도 못 본 남편 하나 바라보고 시집 왔는데 그 남편은 밖으로만 돌고, 술에 취해서 살았다. 그 당시 공주 고보(지금의 공주중학교와 공주고등학교를 합친 형태의 옛날 학교편제)까지 나와서 똑똑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똑똑한 사위 봤다고 친정 부모님이 좋아하셨지만 그게 다 무슨 유익이란 말인가?

결국 엄마의 절망감이 극에 달했다. 하루는 아이들(우리 언니들이 네 살,두 살일 때)을 재워 놓고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늦은 밤인데 여전히 아버지는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볼 때 그 술집 여자들 중 하나와 바람난 것이 틀림 없었다. 여자의 육감이었다. 배신감, 아픔, 실망, 좌절 등이 엄마를 못 견디게 했다. 집에서 논산 저수지까지는 이십 리쯤 되었다. 두고온 딸들 때문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재촉하여 논산 저수지까지 갔다. 저수지 에 빠져 죽고 싶어서였다. 이 한많은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나 싶어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수지에 도착했다. 둑 밑으로 시커먼 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달빛도 거의 없고 별빛만 조금 비치는 캄캄한 밤이었다.

수건을 뒤집어 쓰고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데, 그날 밤, 저수지 물이 너무나 무서웠다.무섬증이 한없이 밀려와서 도저히 뛰어 내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주저앉아 한없이 울다가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셨다. 딸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난 그 일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엄마가 겪으신 고통이 느끼지며, 너무나 불쌍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역사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절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엄마는 나를 임신하셨고 임신중에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딸이 되셨다. 결국은 엄마의 신실한 믿음 때문에 우리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었다.

그 당시 엄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지만, 엄마와 우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계획에는 언니들, 나, 아버지의 삶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나, 두 언니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된 사람들의 삶도 다 포함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였다. 하나님, 엄마를 더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편 2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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