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병원측은 어머니에게 퇴원을 지시했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더 이상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 평소 좋아하시던 전복죽도, 해삼탕도 통 드시지 못했다. 간호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어머니를 침대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침대로 힘들게 운반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 모셔다 드린 어머니를 방으로 운반하지 못해 통로에서 함께 누워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퇴원하면서 소개받은 암 전문의를 찾아갔지만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두 가지였다. 키모 치료를 하든가 모르핀으로 편안한 마지막을 보내든가. 그렇게 말하는 전문의 역시 환자가 연세도 있고, 체력이 너무 다운되어 있어서 키모 치료는 힘들 것 같다며 넌지시 호스피스를 조언했다. 결국 우리는 어머니를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가족회의에서 결정했다.

참 신기하게도 조카가 서류를 제출한 지 하루만에, 정확하게 서너 시간 후에 호스피스 널싱홈의 방이 하나 비었다고 입원 수속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건장하게 생긴 남자 둘이 두터운 담요 같은 것을 들고 오더니 어머니를 둘둘 말아들고 열 개가 넘는 현관 돌층계를 내려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다시는 막내동생집의 현관 계단을 올라오시지 못했다.

구급차를 따라 들어간 그 집은 번화한 도심과 주택가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었다. 어느새 어머니의 문패까지 걸린 방에는 출입하는 문 외에 옆으로 조그마한 창문이 더 있었다. 창문으로 가정집의 뒤뜰이 보였다. 그것이 이 병실에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 풍경이었다.

집의 내부는 평화스런 외양과는 달리 어둡고 칙칙하고 요괴스러웠다. 환자들의 전용물일까, 아니면 병원에서 키우는 걸까. 그 요괴스러움을 증명하듯 밤과 낮을 연상케 하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가 그 칙칙한 방들 사이로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덩치가 개만큼 크고 뚱뚱한 고양이들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먹을 것과 따스한 스킨십을 요구하며 애교를 부리는 하찮은 미물이 아니었다. 놈들은 파랗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보호자들을 주시하며 무언의 섬뜩한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개가 더 낫다고 했든가. 이 그로테스크한 존재에게는 적어도 이곳 입주자들에게는 없는, 넘치는 생명력과 미래가 있었다.

세상 끝처럼 보이던 그곳에서도 생활은 계속되고 있었다. 환자용 벨을 누르면 그들은 기계처럼 다가왔고, 감정이 배제된 무표정한 얼굴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무엇이 필요한지 찬찬히 체크한다. 때에 따라 음료수와 음식도 공급되고, 보호자를 위한 여분의 베개와 이불도 가져다 주었다. 때가 되면 침대 시트를 갈고, 환자용 타월을 바꿔 주고, 환자의 입안이 건조하다고 수분이 든 스펀지를 입안에 넣어 주고, 부르면 고분고분 오고, 목이 마르다면 아이스큐브를 띄운 냉수를 가져왔다. 그뿐이었다. 그들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움직였을 뿐, 감정의 기복이라든가 감상의 찌꺼기들이 그들에겐 아예 존재하지조차 않은 듯했다. 환자에게는 절실한 문제들이 그들에게는 투정처럼 생각되는 모양이다.

“아프면 빨리 가야 돼요. 그게 환자 본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최선이에요!”
하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던 ‘곰’이라는 이름의 중국인 여자 사무원도 있었다.
나는 그 중년의 중국인이 못마땅했다. 빨리 가야 된다니! 그러나 나는 기분과는 달리,
“그렇지요. 갈 사람은 빨리 가야지요.”
하면서 가볍게(미소까지 지으며) 응수했다. 어머니의 진료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발언은 지극히 당연하고 현실적이었겠지만, 내 대답은 이런 뜻이겠다.
‘그렇습니다. 다시는 아픔 없고 괴롬 없는 천국으로 가시는 게 상책입니다.’
이런 내 생각을 불신자인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아니, 예수 믿고 변화되기 전에는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동생과 함께 첫날밤을 보냈다. 천둥치는 소리의 산소호흡기 옆에서 불침번을 선 그날 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야외용 침대 하나를 어머니의 침대 옆에 놓고 그 위에 포개지듯이 붙어 누운 동생과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있어도 기계의 소음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다음날 아침 접하는 호스피스 풍경은 지난 밤보다는 그래도 좀 나았다. 연옥처럼 느껴졌던 그곳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 분명했다. 괴물 고양이도 조금 순해진 듯했고, 환자들이 휠체어에 의존해서 통로와 룸 입구에 여기저기 앉아 있는 풍경은 일반 병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법 그럴싸한 휴식 공간도 있었다. 상태가 조금 괜찮은 입원 환자들이 함께 모여 담화를 나누기도 하고, TV를 시청하거나 가끔씩 원내 컨퍼런스도 열리는 다용도 공간이었다. 식당도 그만하면 훌륭했다. 환자나 방문자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아이스크림과 암환자용 ‘인슈어’ 같은 드링크제들로 가득 찬 대형 냉장고도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며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각양각색의 포즈를 취하며 식당에 앉아 있는 노인 환자들의 모습도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담당직원에게 이유 없이 마구 투정을 부리는 치매 환자가 있는가 하면, 정해진 TV 프로그램을 마다하고(병원측에서 권장하는 프로인지, 아니면 담당직원이 시청하기 원하는 드라마인지) 자기가 선호하는 영상을 보겠다고 앙탈을 부리는 할머니, 기우뚱한 자세로(대부분의 휠체어족들은 몸을 같은 방향으로 기울이고 있음) 앉아 있는 사람들, 구석진 곳에 외롭게 앉아서 철학을 하고 있는 노인,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가득 지으며 앉아 있는 할아버지 등등... 늙고 지치고 상처 입은 삶들이 거기 있었다.

동병상련의 아픔 때문일까. 직원들에 비해 노인 환자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따스한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천연덕스런 표정들을 짓고 있지만 사실 그 가련한 노인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죽음의 집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노인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고양이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 달에 10명 정도 이 호스피스 병원에서 익스파이어(expire)가 되고, 합동장례식도 치러 준다고 한다. 죽음대기실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잿빛 죽음 대기실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자약했다. 그 너그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더 이상 삶에 대한 기대나 환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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