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1월에 개봉되었다는 영화를 우연히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2차대전 중의 독일이 무대여서 영화의 색조도 어둡고 음울했지만, 잠을 쫓아가며 감상한 보람은 있었다. 사람들 모인 곳에 가면 보이지 않는 심리전에 휘둘려 짜증스러웠는데, 모처럼 인간? 아니 인간애 넘치는 동화 같은 영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영화의 원작인 <책 도둑(The Book Thief>)이라는 소설은 호주의 작가 마커스 주삭의 작품이라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1인칭 화자는 '죽음'이고 이야기의 배경은 나치 치하의 독일이다. 주인공은 어느 가난한 독일인 부부의 가정에 입양된 소녀 리젤 메밍거이다. 양부모인 한스와 로사 후버만, 이웃집의 한 반 친구 루디 슈타이너, 그리고 한동안 지하실에 숨겨 주어야 했던 유대인 청년 막스 반덴부르크가 주요 인물들이다. 이 책은 2005년에 발간된 후 숱한 상을 휩쓸었고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230주 동안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잊어 버리기 전에 영화 장면들이나 떠올려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나레이터의 음성이 들려온다. 영화의 시작에도 마지막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데,. 사람은 누구나 그를 피해갈 수 없단다.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존재?  그렇다. 나레이터는 의인화된 죽음이다. 이차대전 중의 독일이 무대이니, 조건 불문하고 죽음은 많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만은 지혜롭게 90살까지 지상에 머물다가 자신을 만났다고 나레이터는 말한다(요건 마지막 대사). 상당히 권선징악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발언도 어울리지 않게 한다. 그럼에도 냉정할 수밖에 없는 이 나레이터가 주인공에게는 '지혜'라는 단어를 헌사한다.

주인공 리젤은 어려서부터 극적인 이별과 죽음을 여러 번 체험하고, 그런 극적인 이별과 죽음의 현장에서 책을 얻는다. 읽을 줄도 모르면서 주워든 책이 그녀와 주변 사람들을 서서히 변화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책'이 나레이터가 말하는 '지혜'의 원천인가? 그나저나 이런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장르에 들어갈까? 과거사를 바탕으로 했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죽음이 소재인데, 어둡지 않은 우화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죽음만큼 인간 모두에게 공평한 체험은 달리 없어서인가?

나레이터인 죽음이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주인공 리젤의 남동생이다. 하얀 설원을 기차가 달리고 있다. 남동생은 엄마의 품에 안겨 있다. 창밖을 보던 주인공 리젤의 시선이 천천히 남동생에게로 옮겨간다. 그런데 남동생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리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여행 중 어딘가에서 남동생은 공동묘지에 묻힌다. 남동생의 묘 위에 책 한 권이 떨어진다. 장례를 치러준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왔을지 모를 그 책을 리젤이 얼른 집어 품 속에 감춘다. 리젤이 처음 도둑질한(?) 책이다. 관료의 손에 이끌려 리젤은 혼자 몰힝이라는 작은 도시의 가난한 마을 힘멜에 도착한다. 리젤을 맡게 된 양부모는 대조적인 분들이다. 나치 입당을 거부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부인이 빨래를 해가며 근근히 살아가는 터라 입양으로 보조금을 받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새아빠는 새엄마의 표현대로 게으르고 무사태평해 보인다. 일이 없으니까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아코디언을 사랑하는 낭만적이고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새엄마는 첫날부터 엄마, 아빠라고 부르길 강요하고 양육에 대해 감사 인사까지 강요하는데, 앉아서 절받는 것 같지만, 그녀 나름의 교육 방식인 듯하다. 가족에게 거친 언사를 내뱉는 것도 실은 가난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면 그녀 역시 속은 깊고 따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리젤이 처음 훔친 책은 '무덤 파는 사람의 지침서'였다. 새아빠는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책이라고 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리젤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그 책을 읽어 주며, 읽기도 가르친다. 학교에서는 약한 아이 괴롭히길 좋아하는 소년의 입을 통해 리젤은 자신의 엄마가 공산주의자여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치는 유대인뿐 아니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장애인, 정신병자, 소수 민족들도 사회악이라고 잡아들여 격리시키지 않았던가. 

 
이제 두번째 책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몰힝 시의 시장이 연설을 하며 외친다. 불온하고 무가치한 지식을 버리자고, 사회에 해가 되는 책을 모두 불태우자고. 주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책들을 불길 속으로 던진다. 히틀러를 향해 충성을 맹세한다. 남동생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던 리젤의 눈에는 사라진 엄마가 불에 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리젤은 불길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잿더미에서 책을 한 권 훔친다. H.G. 웰스의 '투명 인간'이다.

한스와 로사 부부에게 잠시지만 또 다른 가족이 생긴다. 몇 년 전에 죽은 유대인 친구의 아들을 숨겨 주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찾아온 막스라는 청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앓아 눕는다. 리젤은 청년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몹시 궁금해서 훔치려 하지만 청년은 완강하게 주지 않는다. 책 제목이 '아돌프 히틀러'란다. 나중에 기력을 회복한 청년은 하얀 페인트로 활자들을 모두 지우고 공책으로 만든다. 리젤과 막스라는 이름만 기록한 하얀 공책을 리젤에게 선물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책 중에서 리젤이 유일하게 읽지 못한 책이지만 굳이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교실에는 히틀러 사진이 있고, 집집마다 나치 깃발이 휘날리고 기세등등한 공포의 대상은 사방 어디에나 있었으니 말이다.

새엄마의 빨래감 심부름으로 리젤은 시장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가 잿더미 속에서 책을 주워 감추는 모습을 지켜본 시장 부인은 도서실에서 그녀에게 읽고 싶은 책을 읽게 하면서 독서광이었던 죽은 아들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리젤의 시선을 사로잡은 책의 제목은 '꿈의 운반자(Dream carrier)'였다. 그런 나날이 반복되자, 시장은 부질없는 짓이라면서 리젤을 밖으로 내쫓는다. 그 바람에 빨래 일감도 떨어진다. 먹을 것이 없어 끼니도 세 끼에서 두 끼로 줄여야 하는 판에, 일도 줄고, 설상가상으로 지하실에 숨어 있던 유대인 막스가 혼수 상태에 빠진다.

막스가 죽을까봐 걱정이 된 리젤이 시장집의 도서실에 숨어들어가 책을 훔쳐오기 시작한다. 막스에게 책을 읽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다가 옆집에 사는 반 친구 루디에게 들키는데, 음식이 아니라 책을 가져온다는 말에 루디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힘이며, 책은 인간성의 보고라는 말을 막스에게 들었기 때문인지, 책을 읽어 주는 일이 막스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리젤은 믿었을지도 모른다. 리젤은 한사코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라고 주장한다. 그때 처음 친구 루디의 입에서 '책 도둑'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루디는 제시 오웬스 같은 육상선수가 되고 싶어 얼굴에 검은칠까지 하고 달리는 소년이다. 그러나 흑인도 열등한 종족이므로 그를 숭배하거나 흉내내는 건 나치 세상에서는 금기다. 나치의 심사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아무튼 그 때문인지, 다른 무엇이 문제였는지 몰라도 루디의 아버지가 군대에 징집된다.

어느날 족보 어디쯤에 들어 있었을 유대인 조상 때문에 이웃의 남자가 잡혀간다. 열혈 나치주의자들이 유대인 상점을 부수고, 유대인들을 구타하고, 하나둘씩 잡아간다. 잡혀가는 이웃 남자는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새아빠가 게슈타포에게 다가가 사정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보탰다가, 더 이상 막스를 숨겨줄 수도 없게 새아빠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결국 징집되어 군에 끌려간다. 전쟁터에서는 노인까지 징집했다고 젊은 군인들이 낄낄대고, 결국 가벼운 사고를 당해 제대하여 돌아온다.

노란 다윗의 별을 가슴에 단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끌려가는 장면도 나온다. 리젤은 막스를 보지 못했느냐고 부르짖으면서 유대인들 사이를 누비다가 게슈타포에 의해 거리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루디와 리젤은 그런 세상이 싫다. 인적 없는 강가에서 히틀러를 향해 욕을 퍼붓는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죽음이 바빠지는 시간이다. 전쟁 말기 독일에 가해진 융단 폭격은 외진 마을도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집들이 무너지고 불에 탄다. 지하실에서 막스가 선물한 하얀 공책에 글을 쓰다가 잠든 리젤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양부모도 루디도 잠자는 동안 죽고 만다. 모두가 떠났다고 절망한 리젤 앞에 시장 부부가 나타난다.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리젤의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공습 경보가 울리면, 지하실에 숨어 공포에 떠는 주민들을 위해 이야기를 지어 들려 주던 리젤은 결국 이야기꾼, 소설가가 되고, 전쟁이 끝나자 기적처럼 막스가 돌아와 평생 친구가 되고,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손주까지 보면서 잘 살았다고 죽음이 리젤의 뒷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누구도 자기를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해피엔딩이랄 수도 없고, 비극인가 하면 희극 같고, 희극인가 하면 비극이다. 저자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었나보다. 인생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그러니 이왕 죽을 거 착하게 살고, 서로를 따뜻하게 위해 주고 사랑하다가 죽자고...

리젤이 훔친 책 제목들이 이야기의 복선이거나 상징일 텐데, 소설 아닌 영화여서 그런가?  두세 개밖에 알아채지 못했다. 내 눈의 움직임이 둔한 건지, 영화가 소설의 많은 부분을 생략한 건지 잘 모르겠다.  몇 권은 진짜 세상에 발표된 책들이 아닌 것도 같다. 아무려면 어떠랴. 부대끼던 마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은 이 느낌은 또 뭔지. 아무튼 영화 구경 잘했으면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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