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고대의 교회 (3)

III. 발전되고 강화되는 교회 (AD 325-451년)

1. 교회 회의(The Role of Church Councils) (2)

4) 칼케돈 회의(AD 451년)
교회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분한 신성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인하고, 그리스도는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믿음도 확실히 고백한 것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가 두 성품을 가져도 두 인격이 아닌 한 인격이라고 고백한 것이다.(기독론의 정립)

칼케돈 신조가 작성되었으며, 이 신경이 니케아 신경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그리스와 로마 가톨릭의 신앙 표현으로 남아 있고 개신교회에도 그 표현이 많이 남아 있다.

2. 교회의 3대 지도자

1) 암브로스(Ambrose : AD 340-397)
서부 독일에서 출생 AD 374년에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기독교의 성가학을 많이 발전시켰으며, 니케아 신경의 강한 지지론자였다. 그는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징계하여 황제로 하여금 교회에 순종하게 하였다.

2) 제롬(Jerome)
340년경 달마티아(Dalmatia)에서 출생,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AD 386-420)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그때까지 쓰여 졌던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을 지양하고 구약을 히브리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Vulgate)역을 편찬하였다.

3) 어거스틴(AD 354-430)
북아프리카에서 출생, 카르타고에서 공부한 어거스틴은 그 당시 카르타고에 유행했던 마니교(Manicheism)의 신봉자였다. 어머니 모니카(Monica)의 기도로 회개하고 회심하였다. AD 386년, 고향인 힙포(Hippo)의 감독이 되었고, 북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수도원(Monastery home for monks)을 세웠다. 터틀리안에서 키프리안으로 이어지는 서방신학은 어거스틴에서 그 중간 결실을 보게 된다.

이단에 대항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 활동을 하였다. 모든 사람은 죄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될 수 있다는 예정론을 가르쳤다.

그의 유명한 저작은 『참회록(Confessions)』과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등이다.

어거스틴은 예수님의 말씀 누가복음 14:23 강권하여 데려 오라는 말씀으로 기독교도가 이교도를 박해하는 것을 변호하였으며, 이 사상은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이교도 혹은 기독교도들끼리의 박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실존의 필요성과 인간 이성의 요구를 수세기동안 만족시켜 주었으며, 중세의 스콜라 학파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지금 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내의 각 위격의 구분은 외적 활동에 기인하지 않고 내적 관계성에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인간의 언어나 생각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삼위가 어떻게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하나로서 참여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삼위가 되시는 고유한 본질에서 보면 셋이며, 하나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시간적 움직임에 얽매이지 않으시며 모든 피조물을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의 어떠한 간격도 없으신 상태로 동일하시고, 또 진리와 사랑이신 영원 그 자체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로 동일하게 되신다. 어거스틴은 성자의 성부종속설의 논의를 끝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위격의 구별로 움직여 갔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결속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어거스틴은 후대 서방의 삼위일체 신학이 따르게 될 근본적인 방향인 (1) 개체의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강조하였고 (2) 성령의 발출 이론 (3) 삼위일체의 흔적사상을 인간의 심리학적인 면에서 분석 추구했다.

참고로 동방에서는 8세기의 다마스커스의 요한에 의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충분한 진술을 보게 되는데, 성부종속설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3. 교회의 대주교와 주교 체제

각 교회(감독교구)에는 그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있었고 장로들 중의 대표자인 감독이 있었다. 처음에는 감독들의 지위가 똑같았는데, 차츰 로마에 있는 감독이 다른 교회 감독을 능가하는 권력을 얻었고 교황이 된 것이다.

큰 도시 교회의 감독들은 대주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중에서 5개 도시의 교회가 중요시되었다. 이들 도시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로마였다.

1) 예루살렘 교회

로마에 의하여 침공당하고 함락된 후에 예루살렘 교회와 주위에 있던 팔레스타인 교회들이 기울어졌으나, 사도들에 의하여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대접을 받았다. 헤롯 아그립바에 의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당하고, AD 62년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순교한다. 야고보가 죽은 후에 예수님의 또 다른 형제인 시몬이 이끈 이 공동체는 박해 때문에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로 옮겨 가는데, 결국 시몬도 로마인들에게 처형당하고 그 옛날 유대인 교회는 점차 고립되어간다. AD 135년에 일단의 유대인 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이 교회는 5세기경에 역사에서 소멸된다(후스토 곤잘레스의 초대 교회사 40-41쪽).

2) 안디옥 교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처음 크리스천(Christian)이라 불렸으며 바울, 바나바 등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회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다.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들의 어머니 교회가 되었다.

3) 알렉산드리아 교회

로마 제국의 제2 도시로서 학문과 문화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수세기 동안은 오히려 로마보다 더욱 훌륭했다. 복음의 표준인 사도적 기원은 없으나 당대 최고의 학자인 오리겐이 활동했다.

4) 로마교회

로마 제국의 제1 도시에서 교회는 베드로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하며, 바울도 말년에 로마에서 사역하였다.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에게 권능의 열쇠를 전했다고 선언 되었다.

동서의 모든 교회들은 모든 논쟁에서 로마의 감독에게 의존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대한 큰 논쟁에서 정통교회는 로마의 감독의 지도하에서 승리를 얻었다. 185년 이레니우스가 쓴 『이단을 대항하여』 에서 모든 교회는 로마에 있는 교회와 일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차츰 서방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인정되었고 이로 인하여 교황권이 성립되어 로마의 감독을 교황(Pop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라틴어 papa(아버지)에서 유래되었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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