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개혁자라는 별명을 지녔던 수도사 텔레마쿠스는 A.D. 4세기경,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텔레마쿠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로마로 가야 한다. 그곳이 네 일터이다. 그곳이 너를 부른다.” 텔레마쿠스는 즉시 로마로 떠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원형극장 안에서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이 칼싸움을 벌였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잔인한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경기를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텔레마쿠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도 로마의 원형경기장 안에는 8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검투사들의 칼싸움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경기장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피를 본 관중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그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온 힘을 다하여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인 줄 알고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가 검투사들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으려고 하자,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한 명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하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숨이 멎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경기장은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경기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구경꾼들이 자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검투사들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명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명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죽음과 부활을 향한 길이며,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주님만 가시기로 된 길이었고, 반드시 가셔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선택하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절정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그것이 참된 십자가인 것입니다. 참된 십자가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남에게 핍박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오히려 세상이 염려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의 역사가 있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두들 부활의 생명의 능력과 권세는 원하면서, 십자가의 희생은 치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원합니다. 그것은 종교 행위일 뿐,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종교 행위를 하면 할수록 영혼은 허기지고 목마름에 시달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구레네 시몬은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잠깐 동안의 수고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시몬이 진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중에 그의 가족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진 자만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져본 사람만이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항상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십자가의 도가 있는지요?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기에 그것을 감당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가장 필요한 때에 십자가를 졌습니다. 얼마 전까지 예수님이 최고라고 환호성을 치며 따르던 무리들은 지금 쓰러져 있는 예수님을 일으켜 드리지도, 십자가를 대신 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쓰러졌을 때, 예수님이 찾아가 친구 삼았던 삭개오는 어디에 있었나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어디에 있었나요? 광명을 되찾은 소경 바디메오는 어디에 있었나요? 38년 동안 고생하다가 고침 받은 병자는 어디에 있었나요? 고침 받은 그 많은 병자들과 은혜 입은 자들이 모두 어디에 있었나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불신자가 지고 갔습니다. 시몬이 지고 간 십자가는 오늘 우리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 혼자 죽는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혔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요! 가장 귀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축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올 봄에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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