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고대의 교회 (4)

III. 발전되고 강화되는 교회 (AD 325-451년) (2)

3. 교회의 대주교와 주교 체제 (2)

5) 콘스탄티노플 교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천도하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였다.

이후 교회는 비약적인 확장을 하게 되었고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 로마 교회 감독과 동등한 위치로 선언되었다. 동방교회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초기에는 서방교회에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428년에 안디옥 학파로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대주교가 된 네스트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와의 기독론에 따른 정치적인 투쟁(그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당시 교회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 있던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Christo-tokos)라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으로 인하여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당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로 피신하여 그 세력을 이어갔다. 수세기에 걸쳐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교와 이론 투쟁을 계속하였고, 시리아에서 7세기 초에 중국(당나라)으로 퍼지면서 당나라에서는 경교 혹은 대진교란 이름으로 200년 이상을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무종(唐武宗, 814-846년) 때에 외래 종교를 핍박하여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6) 콥틱 교회(이집트 교회)

이집트에서의 교회의 기원은 1세기 바울과 함께 전도했던 마가가 이집트에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콥틱 교회는 단성론(예수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으로 인해 동방교회와 분열되기 전까지는 클레멘트나 오리겐 등과 같은 유명한 교부들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한 출중한 교회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콥틱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정죄당하고, 아울러 유배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서방 지역이나 동방 지역이나,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까지도 하나의 교회로 결합되어 있었다(알렉산드리아 교회). 콥틱 교회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도원 운동의 발흥과 빠른 성장에 있었다.

IV. 잔존하여 재성장하는 교회(AD 376-590년)

1. 로마 제국의 멸망

우리가 교회사의 세 번째 전환점에서 본 것처럼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공인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이 대제국이 되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AD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기 100년 전(AD 376년)에 게르만족과 고트족이 로마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AD 394년에 고트족과 싸워서 이기고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 후 제국을 분할하여 두 아들에게 줌으로써 로마는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완전 분리되었다.

게르만족과 비시 고트족은 몽고 계통의 훈족에게 자기 정착지를 유린당하고 밀려서 로마를 침공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로마제국의 최후 100년은 수난과 재난의 시대였다. 야만의 무리들은 전제국을 난도질하고 유혈의 시련을 주었으니 로마는 파멸로 달리고 있었다. 로마제국에 남아 있던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버렸기 때문에 로마가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을 비난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어거스틴은 습격당한 제국의 동요와 혼란 중에서 그 대답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하였다. 결국 야만인들이 서방 각 지역을 점령하였으니 이탈리아, 북 아프리카, 골(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이었다. 일부의 고트족은 제국을 침입하기 전부터 고트인의 말(Gothic)로 대부분의 성경을 번역한 울필라스 감독의 가르침으로 기독교로 회심하였던 것이다.

서로마제국은 고트족의 오도아케르의 공격에 무너졌으나 교회는 그 야만인들을 축복할 준비가 되었고 그들을 교육하였다.

참고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제국을 이루었다. 7세기 중엽부터 이슬람의 침입으로 많은 영토를 잃고 그 세력이 약해졌으나 8세기 초 황제 레오 3세 때에 제국의 중건을 이룩하였으며, 동방교회에 화상 문제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1453년 투르크족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하였다(역사에서 중세의 끝).

2. 프랑크족의 회심과 복음의 확산

클로비스 왕의 지배하의 프랑크족은 점차로 전 골(Gaul)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골을 프랑스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클로비스 왕은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와 비슷하게 십자가의 형상을 보고 승리하였다. 그는 496년 성탄절에 3,000명의 무사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며 아리우스 계통의 다른 게르만족들과 달리 특별히 니케아 신경의 정통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교회사에 아주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영국(St. Patrick : The Apostle of Ireland), 독일(Boniface), 네덜란드(Williboard)까지 복음화되기 위해서는 AD 500년부터 2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으며 1,000년경까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과 러시아의 복음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V. 고대의 기독교 문화

1) 고대의 기독교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

문학은 고대 문헌, 주로 성경의 필사(Copy)가 주를 이루었고 신화들이 창조되었다. 교리를 설파한 책들이 있으며 성경이 번역되었다.

미술은 카타콤의 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주로 하였다.

음악은 초대교회에서는 몇 개의 음만을 가지고 찬송하였으며, 그 후 암브로스 감독으로부터 교황 그레고리 1세 때까지 서서히 발전하였다.

그리고 AD. 376년 야만족이 유럽을 침공한 이후 300년 동안은 문화 발전의 답보 상태가 계속되는 암흑기(The Dark Ages)라 불리운다.

2) 고대 기독교 문화와 희랍 문화 그리고 로마 문화의 상관관계

고대의 기독교 문화는 플라톤의 사상과 희랍의 헬레니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사상과 이원론적 철학은 하나님에 대한 동방 기독교 사상 형성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그는 다양한 주제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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