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숙(일리노이)

얼마 전 메모리얼 연휴에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다. 작은 교회라서 무슨 일을 하든지 100% 출석률이 자랑인지라 전원이 참석한 수련회에서 우린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2박3일의 일정을 보냈다. 열악한 시설로 불편했지만, 우리 모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천사 게임을 하면서 서로 섬김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기쁨이 충만했고 정말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불 같은 성령이 임한 집회도 아니었고 꼬박 말씀에 붙들려 있지도 않았지만 우린 말을 안해도 성령의 임재를 느꼈고 성령의 간섭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날 목사님이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에서 우리 모두는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분의 겸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목사님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좋아서... 그분의 진실하심에 우린 정말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원의 계획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우린 또 울었다.
우린 각자 아픔과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린 때로 초대교회처럼 부족한 중에도 서로 풍족히 나누길 좋아하고 서로의 아픔과 고난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기도 한다.

우린 서로 도전하지도 도전 받지도 않는다. 그저 양보하고 더 연약한 자를 깊이 섬긴다. 우리의 오장육부를 직접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 내용과 증거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말씀의 실천으로 그 증표를 보였다. 말씀의 홍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아는 것이 많다. 해박한 성경 지식으로 어느 목사님 못지 않은 실력으로 가르치기를 좋아들 한다. 성도가 교회에 가는 이유는 섬기기 위함이라는데, 우린 섬기는 일에는 양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 말씀에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게 죄요,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게 허물이라는데, 우리는 “하라”와 “하지 말라”의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면서 실천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우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내 안에서 자아혁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면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 저리 비키시라고 제쳐놓고 여전히 내 의지대로 행하고 있는가?

성경 말씀이 너무 어려운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우리들 아닌가? 현실의 모든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뢰한다면 우리의 지체를 죄의 도구에서 빨리 돌이켜 의의 병기로 쓰시도록 내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어느 브랜드보다 더 값진 브랜드 네임인 “예수님”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명품들이다. 세상 속에서 우린 “예수님”이란 브랜드의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잘 드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예수님”표에 어울리는 이름값을 하여 실천적 무신론의 시대를 마감하는 하나님의 명품들이 되길 소원해 본다.

가르침과 저술은 흠 잡을 데 없이 성경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실천에 있어서는  복음의 적 노릇을 했다던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 참다운 실천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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