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하여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분들이 느낄 상실감과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며옵니다. 이 참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시련과 상실감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이분들의 고통을 헤아리기보다는 이분들의 절규를 과장하고 호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언론인들이 못마땅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찌할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때로는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더 큰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시련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이러한 시련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합니다(야고보서 1장 3절). 우리가 겪는 시련이 믿음의 테스트라면,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것이며,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시련보다 더 큰 유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로마서 8장 18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시련을 어떻게 잘 통과하느냐’ 입니다.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 사도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장 2절).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기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겪는 시련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고통 받는 유족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에게 이 말씀으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 니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시련을 기쁘게 생각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겪는 시련 그 자체가 좋다는 말도 아니고, 고행을 위해서 일부러 시련을 추구하며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련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련에 대해서 기쁜 체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시련 앞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련이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우리가 겪는 시련을 내적인 기쁨을 위한 기회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세월호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는 인간들의 죄악으로 인한 참사입니다. 그러면 세월호 참사로 인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대를 바라보고, 개인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내야 합니다. 그러면 개인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련 때문에 좌절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개인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좌절하고 무기력하게 있기보다는 차라리 항거하고 싸워야 합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우리의 아픔을 견뎌내야 합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 시대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영적인 기쁨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시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부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시련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시련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하는 시련은 영적인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와 성숙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야고보서 1장 3절)라고 말합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큰 시련을 겪고 나면, 웬만한 문제들을 잘 인내할 수 있는 내공이 길러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듬직한 신앙의 뿌리를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준 신앙의 모범도 바로 인내입니다. 죽기까지 인내하고 참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인내의 능력을 키우고, 그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련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 사도는 “인내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는 능력”(야고보서 1장 4절)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시련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기르는 훈련으로 보았습니다(히브리서 12장 10절).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모난 성품이 다듬어지고, 미성숙한 부분들이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열매를 맺는 숙성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열매는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무르익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인내하지 않고, 기다림의 과정 없이 영적인 열매를 맺거나 축복받은 예는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련과 인내의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까? 이들은 모두 혹독한 시련과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위대한 성품을 발휘했던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시련과 인내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받는 축복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시련까지도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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