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과 이불 속의 따스함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려는 나를 잡았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단호한 몸짓으로 일어났다. 유혹을 이기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더듬더듬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한 물줄기는 손바닥, 팔, 얼굴을 깨웠다. 조용한 기도의 방으로 갔다. 그 순간만이라도 온통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머릿속 청소를 위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주님!”을 부르며 생각을 비웠다. 피곤한 몸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 잘하는 불평과 염려는 물론, 기쁨과 행복한 일까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만국기처럼 나부끼고 있는 기도 제목들조차 모른 체하기로 했다. 멍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빈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난 머릿속을 청소하는 데 성공했다. 텅 빈 그 속에 이제 성령님이 오시기만 하면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 에녹이 동행하듯, 모세가 대화하듯,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고 싶었다. 그 시간이 연장되어 하루를 살 것이고, 일생을 살 것이다. 곁에 오신 예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면 순종할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주님 이끄시는 대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여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하소서…”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오늘 할 일을 지시하시길 기다렸다. 듣고 명령하시는 대로 실행할 선한 성도! 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순간, 아침을 알리는 맑은 새 소리가 창을 통해 들어왔다. 내 머릿속으로 새 소리가 밖의 풍경을 데리고 들어왔다. 밖의 풍경을 버리고 기도할 바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싶었다, “주님!”을 다시 불러 봤다. 새 소리는 계속 들렸고 한두 마리가 더 합세하여 합창을 시작했다. 새들이 앉아 있을 감나무 가지가 생각났다. 어제 봤던 감꽃은 아직도 윤기 자르르하고 보드라운 잎 뒤에서 수줍게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연초록 잎과 크림색 꽃의 조화라니! 그 멋진 모습을 빨리 가서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생각이 뒤뜰을 휘젓고 다녔다. 오이를 심을 공간의 잡풀은 어제 뽑았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뒤뜰을 넘어 언젠가 보았던 식당 정원에 놓인 돌 옆의 이끼도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급기야 그때 접시 위에 놓여 있었던 튀긴 생선의 고소한 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침 먹을 시간이 멀었는데도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생각들을 향해 강하게 외쳤다 “비켜!”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상념을 자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일, 가게 일, 오늘 해야 할 일들이 거침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뒤뜰의 잡초보다 더 무성한 잡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쯤에서 하나님과의 느긋한 대화는 포기해야 했다.

그날 아침에도 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나를 공격의 대상으로 여기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않을 새 소리가 나를 이긴 것이다. 새 소리가 아니라도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무궁하다. 바람 소리, 기차 소리, 그보다 더 작은 모기, 파리 소리에도 지고 말았으리라. 잡념은 나를 다윗이 던진 물맷돌 앞의 골리앗으로 만들어 버렸다. 골리앗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지만 솔직한 나 자신임을 인정해야 했다.

진정한 주님과의 대화는 실패했다. 평소대로 일방통행 기도가 올라갔다. “뵙고 싶고, 말씀을 듣고 싶은데 나는 약하기만 하네요. 주님 난 어떡해요…”그나마 중얼거리는 기도가 잡념을 막아 주었다. 주님과의 진정한 대화와 교제에 또 실패한 난 전화 자동 응답기에 녹음하듯 기도를 올렸다. 차곡차곡 접혀져 있던 만국기의 기도가 줄줄이 올라갔다. 다행히 마음이 평안해졌다. 녹음된 기도들을 들으시고 곧 응답해 주실 거야! 약한 나의 고백을 들으셨으니 곧 도와 주실 거야! 실패자답지 않게 가슴을 펴고 방을 나왔다.

뒤뜰엔 어느덧 햇빛이 가득했다. 금방 터질 듯한 붉은 장미 봉오리가 이슬을 달고 뒷담 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꽃 가까이 갔다. 기막히게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터지지 않은 봉오리에서는 향이 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냄새의 근원은 뒷집의 레몬나무였다. 인심 좋게 풍성한 향을 담장 넘어 보내 주고 있었다. 향에 취해서 눈을 감았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금향로에 올려진 향기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 이런 기도의 향기를 올려드렸을까? 시작은 분명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순종이었지만 실패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전에 나와 내 주위의 급한 일만 쏟아 놓고 말았다. 이기심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처절하게 넘어졌다. 레몬꽃 향기에 취할 자격조차 없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눈을 떴다. 빨간 장미 봉오리가 살랑살랑 바람에 움직이며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속에 향기가 가득 있는 것처럼, 언제가 퍼져 나올 향기가 내 속에도 있다고 용기를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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