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고대의 기독교 문화 (2)

2) 고대 기독교 문화와 희랍 문화 그리고 로마의 문화의 상관관계 (2)

희랍의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는 토론과 논쟁을 주로 하는 두 개의 철학사상인 에피큐리안(The Epicureans)의 쾌락주의와 스토익(The Stoics)의 금욕주의, 그리고 세계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스토아학파는 서방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쾌락주의: 하나님 혹은 신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삶의 목표를 쾌락이라고 했는데 이는 음탕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들로 둘러싸인 평화와 고요함을 말한다.

금욕주의: 논리와 이성을 강조하며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이탈하고 욕정을 절제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희랍의 문화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킨 인간이 만든 신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희랍의 사고방식은 희랍이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 후에 역으로 로마의 사상과 문화를 지배하였다.

희랍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게도 무한한 신은 없었다. 로마는 BC 12년 이후,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가 국가 종교의 수장이 되어 최고 신관의 칭호를 얻고 로마의 정신과 황제의 수호신을 숭배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촉구했다.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린 로마의 법률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구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이끌어 주기에 충분한 큰 존재나 영원한 존재가 없었다. 이들 신들은 자기들을 만든 사회에 의존했고, 이 사회가 붕괴되었을 때 신들도 사회와 함께 몰락했다. 연약한 기반을 가진 문화나 개인은 기반의 압력이 그다지 크지 않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민족의 삶이 압박을 받을 때 그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종교적 혼합과 문화의 혼합주의에서 비롯된 로마의 결점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의 강한 힘을 말해준다. 이 힘은 하나님이 무한한 인격신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구약으로,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으로 형성된 신약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 헬라화가 기독교 사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교리의 전반적인 발전을 헬라화된 기독교가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헬라화의 형식과 사상을 본능적으로 배격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주와 사람에 관한 지식은 물론 삶을 영위하고 사회와 국가를 판단하는 절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독특한 존재로서의 개인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가치를 영유하고 있다.

C. 중세의 교회

I. 교권의 확립

1. 그레고리 1세

그레고리 1세(Gregory I : 590-604 재위)가 590년에 로마 교황이 된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루었다. 시기적으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는 때이다.

그레고리는 교부였고 로마 감독이었으며 중세 최초의 신학자요, 교황이었다. 그레고리 1세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 조직 또는 교구에 있어서 여러 면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의 호를 처음 사용했고, 성서를 주해했고 교회의 규칙을 쇄신했으며 교직의 매매를 엄금하고 교역자의 결혼을 금해 놓았다. 정통신앙을 확립하고 교회의 전형적인 예배의 순서를 제정했으며 교회의 음악도 발전시켰다.

그는 작은 죄와 큰 죄를 구분하고 작은 죄는 타인의 중보적 기도로 연옥에서 사함을 받아서 죄인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면죄부의 교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2. 교회의 영지의 시초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안이 동고트인들로부터 이탈리아를 다시 점령한 후 14년만인 568년에 이탈리아의 북부인 포오(The Po Valley) 지역을 게르만 계통인 롬바르드(Lombards : long beards)인들에게 빼앗겼다.

이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이었으며 니케아 신경, 즉 정통 기독교의 적이 되었다. 롬바르드족은 끊임없이 로마 교황에게 위협이 되었다.

투울 전쟁의 영웅 찰스 마르텔은 프랑크족의 왕은 아니었으나 영향력이 강한 고관이었다. 찰스 마르텔의 아들 페핀(Peppin)은 클로비스 왕조의 최후의 왕인 킬데릭(Childeric)을 폐하고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에게 왕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며, 751년 페핀은 신권에 의하여 수도원에서 왕이 되었다.

교황 자카리아스는 페핀에게 롬바르드족을 제압하여 주기를 요청하였고, 페핀은 롬바르드족을 평정하고 그 땅을 교황에게 넘겨주어 교회의 영지(States of the Church)가 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교황은 현세적 통치자가 되었고, 이후에 교황권과 제국과의 사이에 투쟁이 치열하였으며, 중세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II. 이슬람교

1. 이슬람교의 기원

이슬람교의 마호메트(570-632)는 아라비아의 메카성에서 출생하였고 6세 때에 그의 어머니는 죽었다. 마호메트는 신령, 징조, 꿈 따위를 믿으며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양 치는 집에 가서 소년기를 보냈다. 마호메트는 25세 때에 15살 연상의 부자 과부 카딩야와 결혼하였다.

그는 610년 즉 40세가 되던 해에 환상(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을 보고 전도하라는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및 아라비아의 이교사상을 혼합하여 여기에 마호메트가 본 환상과 그가 상상하는 바를 보탠 것이었다. 이 교리의 중심은 창조주격인 알라신,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코란경, 예언자들, 그 중에서 최후이며 유일한 예언자가 마호메트 자신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섯 가지 실행할 의무를 정해 놓았다.

첫째, 알라신 외에는 신이 없으며, 마호메트는 알라신의 예언자라는 신조를 외우는 일
둘째, 메카를 향하여 기도드리는 일
셋째, 이슬람교의 달력으로 9월에는 30일 동안 금식하는 일
넷째, 자선사업을 하는 일
다섯째는 메카를 순례하는 일 등이다.

마호메트는 당시 정치가, 조직가, 행정가로서 설득력과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참고: 사라센 제국의 탄생
570년,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이 오랫동안 싸웠던 아라비아반도에서 마호메트가 태어났다. 마호메트는 40세에 신의 계시를 받아 메카에서 포교하지만 지배계급의 박해를 받아 메디나로 탈출한다(이것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교단이 확립된다). 메디나에서 세력을 규합한 마호메트는 신정일치의 사회를 만들며 급격히 세력을 확장한다. 630년 마호메트는 이슬람 신도군과 함께 메카를 점령한 후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을 이슬람의 세력 하에 통일한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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