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향의 한 사업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곡상, 혹은 도정업자라 불렀다. 그가 소유한 상가도 많았고, 특히 그가 하는 정미소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농촌이 한창 번성했던 시기, 옥토가 유난히 많았던 우리 군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벼들이 그의 정미소를 거쳐 쌀이 되어 대도시로 나갔고, 또 정부미도 그 정미소를 통하여 나라의 곡간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읍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던 그 정미소는 추수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철 쉬지 않고 윙윙 소리를 내며 일하였다. 수건을 쓰고 왔다 갔다 분주히 움직이는 일꾼들을 보면서 어린 우리는 쉬는 날이 없는 건 아닐까하는 염려를 하기도 했다.

근처에 그의 집이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정미소와는 반대로 굳게 닫힌 대문, 조용하고 넓은 정원 속으로 깊숙하게 자리한 저택이었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이런 큰집에서는 어떤 모습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고 선망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곤 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은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이따금 서울에 가서 수금해 오곤 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거금을 운반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두둑하게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나 지갑들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던 도둑들의 눈이 금방 알아봤고, 돈에만 관심을 갖는 그들은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지금처럼 은행이 활성화되기 전, 수표 등 대체 현금도 쓰이지 않았던 때인지라 수금한 돈들은 모두 현금이었다. 아무리 고액권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부피는 크기만 했다. 큰 돈 뭉치를 보자기나 가방에 넣어 무겁게 들고 다니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불량배들이나 소매치기들을 따돌릴 수 없었다고 했다.

보디가드를 몇 명씩 데리고 다녔지만, 열 명의 불침번이 한 명의 도둑 못 막는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작정하고 노리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쉽게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현금인지라 돈 앞에서는 생명까지 하찮게 여겨 해하는 수가 있어서 그 많은 현금을 지니고 다니는 일은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었다.

자가용까지는 부릴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닌 그때,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을 터이지만, 그는 꼭 밤기차를 이용했고, 한 번도 위험한 순간을 맞지 않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의 이면에는 그만의 특별한 지혜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역, 사람들 속에서 눈에 불을 켜고 따라붙는 불량배들의 시선과 함께 기차에 오르면 제일 먼저 잘 보이는 선반에 돈 보따리들을 올려놓고는 그중에 한 뭉치를 꺼내어 “돈이다. 돈.”을 크게 외치고, 지나가는 판매원을 불러 세워, 먹을 것 마실 것을 충분히 구입해 같은 칸에 올라 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모두가 돈을 지키는 자가 된다고 했다. 행여 누군가가 돈 보따리들 옆으로 가면 모든 눈들이 따라갔기에 안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침이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승객들 모두를 파수꾼으로 만들고 혼자 태평하게 잠을 잔 그는 무사하게 돈 보따리를 들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이 크고 탁월한 사업가였던 그의 이야기를 어린 우리들도 귀를 쫑그리고 놀라며 들었다. 꽁꽁 숨기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의 방법대로 돈 보따리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보호되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가게를 시작하고 얼마 동안은 내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밝히지 않았다. 부족한 내가 잦은 실수로 하나님의 성호에 혹 폐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가게뿐이며, 이곳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자면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세탁물 포장지 위쪽에 시편 18편 1절을 큼직하게 써 넣었다. 'I Love, O Lord, My Strength(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반응은 즉각 왔다. 자신도 성도라며 반가워하는 사람이 많았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아침 출근을 준비하는데 옷장을 열자 그 구절이 눈에 띄어서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믿지 않는다는 어떤 손님은 크리스천이라고 공포한 사람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면서 나를 꼼짝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 손님이 옳았다. 하나님 백성임을 알렸으니 스스로 근신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향의 사업가가 돈 뭉치임을 알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시하여 좀도둑의 손을 피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밝힌 난, 모든 손님이 알아 주고 믿어 주어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못 박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삼가 행동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힐 때에만, 달콤하게 달려오기도 하고 아픔과 슬픔을 갖고 찾아오는 사탄, 마귀의 손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인, 내 안에서 거룩함을 허물고자 시시때때로 기회를 보고 있는 악한 생각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너무나 부족하기에 세상에서 또 내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그 많은 죄를 접할 기회가 올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에게 외치며 십자가 앞에 꿇어 앉아 보리라.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신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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