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은 산재 소송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주인공은 산재 희생자의 아버지이다. 30년 동안 택시 기사로 일해온 아버지(배우 박철민)이다. 북어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부모와 동생에게 경제적 보탬을 주고 싶은 철든 딸, 유행은 무조건 따르고 싶고 공부는 하기 싫은 아들이 그의 가족이다. 평범하고 가난한 서민 가정의 전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딸이 회사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공장일 망정 대기업에 입사한 딸이 출세한 것 같아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2년도 안 가서 금의환향이 아니라, 죽음의 절망을 안고 딸이 돌아온다. 처음에는 그저 딸이 약해서 큰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아버지는 오로지 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한다. 그래서 대기업의 대리인이 퇴사를 조건으로 내미는 위로금도 고맙기만 하다. 산재 신청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이상하지만 그래도 감사하게 받으려 한다. 딸을 살려야 하므로...

그러나 백혈병에 걸린 딸이 고통 중에도 그 돈을 받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한다. 딸은 작업 환경 때문에 자신이 병들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아버지는 회사 때문에 딸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걸 밝혀 내겠노라고 딸과 약속한다. 결국 투병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딸은 죽고 만다.

약속은 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회사는 집요하다 못해 악랄하다. 아버지가 직업병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대기업은 가족까지 뿔뿔이 갈라놓는다. 사회로부터 왕따 시킨다. 철부지 아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집을 떠나게 하고, 미행하고 수군거리는 이웃 때문에 엄마는 겁에 질려 있다. 그러나 딸과의 약속은 곧 딸의 유언이기에 아버지는 지칠 줄 모른다. 아니 지칠 수가 없다. 일인 시위를 하고 추모 행진을 하고, 증언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산재 소송을 하기에 이르고, 어렵사리 재판에서 이긴다. 곧바로 기업의 항소가 이어지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아버지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힘 없는 이들이 하나둘 모이니까 외롭지 않다. 자기 가족만 챙기려 했을 때에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힘들었는데, 풀뿌리 하나하나가 따로국밥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니 없던 힘도 생겨난다.

사회 정의가 무엇인지, 생명권이나 인권이 무엇인지, 산재 보상이 무엇인지를 알아갈수록 개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자라난다. 사랑의 범주가 가족에서 약자들의 사회로 확장된다. 기업은 아버지에게 몇십만 원에서 출발한 위로금을 몇백만 원 급기야 10억 원까지 올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돈 한 푼 못 받아도 상관없다면서 딸의 병과 죽음이 산재라는 걸 인정받기까지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한다. 딸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이 들어줄 때까지, 대기업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근무 환경을 바꾸고 보상을 해줄 때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법적으로 받는 보상금이 위로금 10억 원보다 적다 해도, 사회의 모든 약자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려면 개인적인 사정이나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아버지는 딸의 죽음과 기업과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배운 것이다. 결국 딸과의 약속이, 약자들과의 인연이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지켜 주었다. 승소한 날 아버지는 외친다. “아빠가 해냈다.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

 

강원도 사투리로 아버지가 내뱉는 말 “우리는 한 가족이래요.” 이 한 마디를 듣는데 목구멍이 콱 막힌다. 나 또한 풀뿌리 서민인데다 동포들이 서로 이웃사촌이 되어 주지 않으면 외로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는 이민자이기에 “우리는 한 가족이래요”라는 말이 간절하게 그리워진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다음의 글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어느 현자(賢者)가 제자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새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한 제자가 대답했다. “세상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새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지요.”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세상이 그 형체를 드러내어 나무와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새날이 밝아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스승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여러 제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나름대로 이야기했지만 스승은 계속 아니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면 스승님은 어두운 밤이 가고 새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아온 것이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새날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웃이 형제로 보이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비로소 새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99% 실화이며, 2003년 삼성반도체(극중에선 진성반도체)에 입사했다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황유미씨와 아버지 황상기씨가 서로에게 했던 ‘약속’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김태운 감독은 웹사이트를 통해 말한다. 영화는 딸이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가족에게 한 약속부터 보여 준다. 택시기사인 아버지의 자동차를 새 것으로 바꿔 드리고 동생의 대학 등록금도 대줄 것이라고 딸은 가족에게 약속한다. 그러나 2년도 안 가서 딸은 병들고, 투병하는 딸을 찾아온 회사측은 퇴사를 요구하고 산재신청도 하지 말라고 회유한다. 딸이 아버지의 자동차 안에서 사망한 뒤, 갖은 노력에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아버지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위로금 10억 원의 합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백혈병 발병자와 사망자들을 대표해서 대기업과의 무모하게만 보이는 기나긴 싸움 끝에 2013년 승소를 얻어냈다. 재판 6년만에 기적적인 직업병 승소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판결이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sharps)'에 접수된 피해자는 151명이며 그 중 58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나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니라고 제작 노트에서 밝혔다. 가족 사랑, 이웃 사랑의 성장 과정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실화가 너무나 극적인 영화 같아서, 기적 같은 승소 판결을 기사로 접한 김 감독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속초로 직접 내려갔다고 한다. TV 고발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에 소개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반도체 노동차의 인권 단체인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를 통해 알게 되면서 감독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은 실화에 거의 첨삭을 하지 않은 채,  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진실을 밝히고자 애쓰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려냈다고 한다.

감독과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의기투합을 했고, 개인 투자자들과 풀뿌리들의 사연 가득한 지원을 받아, 예산은 적고 촬영 기간은 짧았지만 모처럼 의미 있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고 김 감독은 제작 노트에서 말한다. 그뿐 아니라 상영관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시민단체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상영관 숫자도 늘어날 수 있었고 관객수도 나날이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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