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중세의 교회 (3)

IV. 유럽의 선교 (2)

3. 독일 지역
독일의 사도라고 일컫는 보니페이스(Boniface 672-755)는 영국인 수도사로서 귀족 출신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학자였다. 그는 교회의 임명을 받아 독일 전도의 사명을 띠고 나가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보니페이스는 이교적인 예배가 성행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여 세례를 베푸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V.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교회

1. 봉건제도의 발달

843년 샤를마뉴 제국은 동 프랑크 왕국(독일), 서 프랑크 왕국(프랑스), 중 프랑크 왕국(이탈리아)으로 갈라졌으며 슬라브족, 헝가리족 그리고 북방 스칸디나비아(바이킹)족이 침공해 와서 유럽은 무질서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샤를마뉴의 계승자인 왕들은 이들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하여 토후와 귀족들에게 군사적 도움과 봉사를 조건으로 땅을 나누어 주게 된다. 땅을 받은 자들은 봉신(Vassals) 혹은 가신이라고 부르고, 그 땅을 봉토(Fiefs)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 귀족들은 소작인들에게 땅을 분배하여 장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유럽 전역에 봉건제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봉건제도의 정치적 결과는 지방 분권을 가져왔다. 경건한 사람들은 땅을 교회나 수도원에게 주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로써 지주(Landlord)들이 생겼으며 황제들은 대주교 혹은 교황에게도 봉토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봉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2. 서임권 투쟁(1075-1122)

이탈리아 영주들의 패권 다툼으로 인하여 891년부터 955년, 요한 12세까지 20명 이상의 교황이 바뀌는 혼란 속에서, 요한 12세는 독일의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오토 1세의 도움 속에서 요한 12세는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제국의 교회에 대한 지배가 계속되다가 하인리히(헨리) 3세 때에 최고조에 달하였고, 다음 황제인 헨리 4세 때에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반격함으로써 서임권 투쟁이 발생하였다 서임권 투쟁으로 인하여 교황과 황제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그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감독과 수도원장들은 단순히 교회 직분뿐 아니라 봉건제도의 지주로써 세상을 통치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신성로마 제국은 독일과 연관되었고 교황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나오게 되었다.

3. 동, 서방 교회

1) 동서 교회의 분리

동방과 서방이 오랫동안 같이 내려오다가 어떻게 갈라졌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다 교부시대부터 서로 정통 계승을 주장하며 주된 교리도 같았고, 경전도 같았으며, 예배의 형식도 같았다. 동방(희랍)교회는 그들의 신조를 자랑하였고, 서방(로마)교회는 주권, 곧 지배권을 자랑하였다.

두 교회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동방(희랍) 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가르치고(성자의 성부 종속설을 전부 배제하지 못했다), 서방(로마)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2) 서방(로마)교회에서는 교황의 세계적인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반대한다.

(3) 서방(로마)교회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성을 주장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반대한다.

(4) 동방(희랍)교회에서는 하급 교직들이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서방(로마)교회는 교직자 누구나 독신생활을 할 것을 명한다.

(5)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없는 떡을 사용하는데 동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누룩이 있는 면병을 사용한다.

그러나 두 교회의 사이를 더 벌려 놓은 것은 교회 안의 화상 문제였다.

7세기 전까지는 동서 교회는 물론이고 회당 안에 그리스도, 사도들, 성자들 및 순교자들의 초상이나 화상이 많이 걸려 있었다. 처음에 이것들을 비치한 목적은 그리스도 교회의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당치 않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화상 숭배는 찬반으로 말이 많았으나, 마침내 희랍교회에서는 벽에 화상을 그린다든지 모자이크하는 것만 용인되었고, 예배의 대상이 될 만한 초상과 조각상은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

동서 교회는 1054년에 크게 분열되고 말았다. 분리된 원인이 많으나 크게 충돌된 것은 동방교회 총주교가 로마 사절들이 있는 데서, 추기경 험버트가 작성한 논쟁문을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교황이 보낸 로마 사절들은 성 소피아 교회의 제단에 파문장을 놓고서 발에 붙은 먼지까지 털어 버리고 물러나갔다. 이때의 보복으로 총 주교는 로마교회를 파문하였다. 1054년 7월 16일, 동, 서방 교회가 서로 파문장을 발송하므로 완전히 분열되어, 희랍정통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인종상의 차이, 언어의 차이 그리고 로마교회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왕관을 수여한 것도 이유 중에 포함되었다고 본다.

2) 동방교회의 정체

헬라어의 동방교회는 많은 신학자들, 클레멘트, 오리겐, 아다나시우스를 탄생시키고 사상적인 면에서 서방교회보다 발전하였으나 동방교회는 이슬람의 침입과 동방제국의 독재적인 영향(화상 및 성상 문제 등)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동방교회의 최후의 신학자는 다마스커스 사람이라 불리운 요한이니 그의 책 『지식의 샘』에서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의 교리를 라틴어로 알기 쉽게 총괄하였다. 이렇게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에 영향을 주었으나 아래와 같은 큰 이유로 정체되고,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1) 이슬람교의 확장 : 1453년 터키족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이스탄불로 개명되었으며 성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2) 토속종교와의 혼합으로 기독교 색채를 잃어버렸다. 예 : 중국 당나라의 경교(네스트리우스교)

(3)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해 동방교회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4) 중세를 강타한 전염병(흑사병)으로 교인들의 대다수를 잃어버렸다.

4. 교황권의 확장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내재하는 죄악 때문에 교회의 내적 생활은 참되고 완전할 수가 없었다. 중세의 일반 신비와 교회의 타락은 사람들이 영적 만족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성경의 순수한 본질로 복귀하는 대신 금욕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1) 수도원 제도와 클루니 개혁

중세에서 일반적인 신앙과 타락한 교회생활은 수도원 제도의 발달을 가져왔다 수도사들은 금욕생활을 통하여 종교적 명상과 종교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910년 동프랑스 클루니에 창설된 수도원은 금욕적 규율로 참된 영적 각성을 통하여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는 데 선봉이 되었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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