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디거~ 대디거!~ 대디거!~”

주일날 친교 시간에 우리 교회의 막내인 이레는 제법 영어를 한 마디씩 섞어가며 본당과 복도를 돌아다니며 외치고 있었다. ‘대디거’라니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난 아빠를 끔찍이 좋아하는 아이가 뭔가를 '아빠 거'라고 외치는 모양이라고 혼자 짐작을 했다. 뭐길래 그리 아빠 것이라고 온 교회를 돌아다니며 소리치는지 궁금하여 아이를 따라가 보니 손에는 장난감 플라스틱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아이를 안아 주며 장난감이 왜 아빠 거냐고 묻자 고개를 흔들면서 ‘대디거’라고 말했다. 답답한 난 "대디 거가 곧 아빠 거"라고 설명을 하자 아예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빠거 아니고 대디거!”라고 큰소리로 우겼다. ‘대디’는 영어로 '아빠'가 분명했고, ‘거’라는 소리는 '것'을 쉽게 하는 요즈음 한국말이 아닌가!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내 말이 분명 맞는데 그 꼬맹이는 아니라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질 않은가! 더군다나 플라스틱 장난감 마이크를 아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그렇기도 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와 내가 서로 우기고 있는데, 우리 곁을 지나가던 이레 아빠가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겨울 왕국(Frozen)'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노래 중에서 쉽게 부를 수 있는 ‘Let it go!’ 라는 대목을 부르는 거라고 사건을 수습해 주었다. 아이는 "Let it go!"를 외쳤는데 내 귀에는 "대디거"라고 들리다니.

몇 주 전에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보내 주었던 이야기와 같은 일이 내게도 벌어진 것이다. 요즈음 한국을 휩쓸고 돌아다닌다는 그 이야기. 한 회사 고객 센터 직원과 전화를 잘못 건 할머니와의 통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젊은 남자가 “*** 플러스입니다.”라고 응답하자, 당황한 듯한 할머니는 아는 사람일 것 같은 이름을 댔다. 친절한 직원이 다시 "*** 플러스입니다."라고 말하자, 이 할머니는 ‘플러스’라는 말을 ‘불났습니다.'로 이해하셨다. 전화를 걸었으니 당연히 가까운 사이일 텐데, 그가 있는 곳에서 불이 났다니 이 할머니는 걱정이 크셨나보다. 그래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고객 센터"라고 대답하는 직원의 말을 '목욕 센터'로 듣고, "목욕 센터에 불이 났느냐"고 물으니 직원은 "플러스"라고 대답했다. 할머니의 입장에선, 분명히 불이 났다고 말하면서 또 왜 아니라고 해쌌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직원은 계속 친절하게 자신의 회사를 소개했고 불 끄는 것이 급한 할머니는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불통의 극치를 보여 준 잘 짜인 한편의 희극 같았다. 인내심과 친절이 알려진 그 직원은 자신의 회사로부터 고객 서비스 친절상 1위를 받았으며, 그 녹음 내용은 스마트 폰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유명해진 그 직원은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을 너무 받아 숨어 다닌다는 뒷이야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 직원의 인내를 배우고 싶어서 몇 번을 듣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할머니의 문제가 내 자신의 문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레와의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만 이해하였기에 일어난 불통이었다. 이레의 생각과 그의 취향을 접어놓고라도, 얼마 전 미국과 한국을 휩쓸었던 '겨울 왕국'이라는 영화, 또 그 삽입곡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레를 울릴 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렛잇고'를 알고 같이 불러 주었다면, 그는 나를 통하는 사람으로 알고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자기 말만 우기는 할머니로 이레의 마음에 새겨졌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저만 할 때 인식된 내용을 지우기는 어려울 텐데. 내가 좋아하는 이레의 마음을 무엇으로 다시 얻는단 말인가!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영어와 한국어권으로 나누어진 우리 가족에게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늙음으로 청각이 어두워지기까지 하면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특히 급한 성격의 난 찬찬히 듣고 앞뒤를 생각하는 훈련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영어 세대인 아이들과 또 그 다음 세대와의 불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가족 안에서조차 도태될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이해력이기에 소통의 폭을 넓히기 위해선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리라. 늘 배우는 자세야말로 세상과 가족 안에 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인간 사이도 이런 불통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그분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말씀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더 많이 성경을 보고 하나님과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당부도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인가보다.

60년대 초 우리들을 웃게 했던 일화가 생각이 난다. 어느 겨울날, 동네에서 한 대뿐인 라디오 앞에 방 가득히 사람들이 모여 방송을 즐겼다. 3시가 되자. 라디오에서는 땡 하는 신호음과 함께 “KBS 세 시를 알려 드렸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한 사람이 말했다. “페니시링 준다고 헌가?”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어는 페니실린뿐인 듯했다. 곧바로 라디오에서 “HLKA 여기는 광주 방송입니다.” 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때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랑게! 예방주사 준다고 허는 소리 같구만” 그러자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분들은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이셨다. 그 방에 함께 계셨다는 할아버지들을 길에서 만나면 영어를 배우는 우리 세대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 웃어가며 인사를 했다. 이젠 내가 그 할아버지들의 자리에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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