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의 진실성이나 허위가 당신에게 생사의 문제가 되기까지는, 당신이 그것을 얼마만큼 진정으로 믿는지 결코 알 수 없다.'(C. S. Lewis)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는 그분이 그보다 더 좋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폴 브랜드 박사, 인체고통 감각기관 연구가)

인간의 고통망은 어떻든지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놀라운 설계이다.

'고통은 나의 회복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주의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삶은 공포와 위험의 비참한 연속일 것이다. 고통의 신호를 두뇌에 전달해 주는 바로 그 신경 감각기관과 통로가 또한 쾌감의 신호도 전달해 준다. 기독교의 진수는 진정한 성취라는 안일한 이기심의 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럽고 지루한 수고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의 감각 조직 가운데 너무 단단히 짜여 들어와 있으며, 자기 기쁨과 성취에 이르는 한 필수 단계가 되는 것이다. 고통이 없는 즐거움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행복은 그것을 좇는 자에게서 물러난다. 우리 모든 인간 속에는 재기, 창의력, 동정심의 경향이, 기만, 이기주의, 잔인성의 경향과 서로 밀치락거리고 있다.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이 고통이 계속 사라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라는 질문이 되어 버린다. 성경은 고통과 악이 세상으로 들어 오게 된 경로를 인간의 장엄하지만 무서운 한 특징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동물류의 판에 박힌 본능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환경을 조작하고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인은 이 행성에 어떤 새로운 것을 들여 왔다. 그것은 본래의 의도에 대한 반항이다. 우리는 지구가 어떻게 의도되었는지에 대하여 약간의 암시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다름 아닌 인간이 그 틀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체스터톤(G. K. Chesterto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야생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한다. 그러나 인간이야 말로 유일한 야생동물이다. 망가뜨린 장본인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다른 모든 야생동물은 길이 잘 든 동물이다. 그 종이나 무리의 거친 습속을 따른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는 벽을 만들었다. 이 벽 안에서 우리는 실컷 우리 좋을대로 살고 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법칙들을 따르기도 한다. 사랑과 평화와 선의 길 말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 말을 들어 주신다. 그분은 우주의 모든 법칙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적어도 당분간) 인간이 원하는 대로 행할 자유를 허락하신다.

'세상을 만드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을 자유롭게 하셨다. 하나님은 시라기보다는 희곡을 쓰신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계획한 대로는 완전한 작품이었으나 필연적으로 인간 배우들과 인간 연출자들에게 맡겨졌으며, 그후로 이들은 그것을 크게 망쳐놓고 말았다.'(체스터톤)

이 세상만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라. 세상은 반역 가운데 있다. 하나님은 이미 지구 위에 “유죄선고” 표지를 거셨으며 심판을 선언하셨다. 악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그래도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이지 잔인성의 증거가 아니다. 아무튼 고통과 고난은 오용된 인간 자유의 필연적인 동반자로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할 것을 선택했을 때 그의 자유로운 세상은 영원히 망가졌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인간의 자유에 위탁하심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한계를 지우셨다. 창조주가 어떤 매개물을 도입할 때는 항상 그 매개물에 의해 저항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고정 법칙들을 만드셨는데 그 법칙들은 우리 의 오도된 자유에 의하여 악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고통망 역시 우리를 위한 유용한 선물이긴 하나, 이 지구상에서 남용되고 있는 과도한 고난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고통의 실제적인 결과는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 모순됨이 없다. 지구는 하나의 오염된 행성이며, 고통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게 말씀하시기 위해 무엇을 사용하실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움직여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것인가? C. S. 루이스는 “고통, 즉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이 지구상의 고통의 존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소리치는 하나의 외침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멈춰 세우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가치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큰 소리로, 고통은 인간의 전체 상태가 표적을 못 맞추고 빗나갔음을 알려 주는 하나의 “초월의 소리”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오염되고, 상처가 생긴 행성임을 거리낌없이 인정했다. 모든 시대의 낙관주의는 언제나 우리가 이 세상에 꼭 적합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해 오고 있다는 바로 이 점에서 거짓되었고 낙망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낙관주의는 우리가 세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을 병상에 묶어 두는 질병이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몰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얼마나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가를 거듭거듭 반복해 들려 주는 하나님의 확성기--신체적 고통--를 무시하고 있다. 고통은 생의 가치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그분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 고통이라는 것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고통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택했다. 에덴 동산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 역시 선택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통 당한다는 것은 심지어 이 오염된 행성 위에서 영구성이 없고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상태를 지적해 준다는 점에서 도덕적 가치도 있다.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 안으로 개입해 들어 오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장기 적인 계획은 물론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속 사업이었다. 이생에서는 악과 선이 항상 처벌받고 포상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며, 우리의 자유로운 반응을 기다리는 분이시다.

진정한 믿음은 확고한 증거가 없는 믿음 -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 - 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원인의 쟁점에서 반응의 쟁점으로 방향을 돌린다. “고통과 고난은 이미 일어났다. 그러면 이제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이다.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진정한 쟁점이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가?”가 아니라, “이 무서운 일이 일어난 지금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당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아마 고통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간명한 요약일 것이고 또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강조하는 성경의 논조와 조화가 된다. 고난은 그 무엇을 생산해 낸다.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의 반응에 주의를 집중하시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걸림돌이 되어 왔다. 부활이라는 것이다. 최후의 대적인 사망 그 자체가 분쇄된 승리의 순간이다. 그분은 단지 인간의 체험 위에 보다 높은고 신비스러운 층을 더 하시는 것이다.

신학은 “거름더미 위의 파랑새”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섭리라고 부르는 원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섭리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외관상의 비극은 세상을 위한 구원이 되었다. 어떻게 고난이나 악이 기뻐할 이유로 변할 수 있는지는 우리에게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된다.

난의 신비는 기독교의 한 역설이다. 고통은 승리와 다투며 절망과 사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라는 최악의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성경은 그리스도의 지침서이며, 그것이 고통과 고난에 대해 던져 주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신적 고난과 육체적 고통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의 문제를 경고해 줄 뿐이다. 그것들은 병의 특성들이지 병 그 자체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에서 해방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고난 당하셨다고 믿게 되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그는 아셨기 때문이다.'(앨런 페이턴)

예수께서 세상에 남겨 주신 상, 기독교의 가장 흔한 상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돌아 보신다는 증거이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신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한 종교만이 인간이 되어 죽기까지 관심을 가지신 신 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이 없는 내세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픔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는 고통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은 모든 것을 견딜 만큼 가치가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새롭고 믿기 어려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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