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참으로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율을 느낍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다른 각도에서 교과서 역할을 합니다. 즉 어느 각도에서 읽고, 해석하고, 따르느냐에서 활동의 시금석이 됩니다.

사회주의 운동가들, 공산주의 사상 보유자들, 해방신학 주창자들, 사회정의 실천운동가들, 자유주의자들, 독재자들과 그 반대자들, 미래주의자들 등 모든 사상과 그 추종자들을 총망라하여 그들의 강령 등의 바탕에는  성경 말씀이 깔려 있습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다보면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기(자아) 비판”이요, 다른 하나는 최고 지도자 동지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이 붕괴되더라도 지도자만 살아 있으면 조직은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도자의 “절대보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반대로 그들의 신념이 성공하여 정착되었을 때에는 그 “절대보호”가 “절대복종”으로 변할 소지가 많을 듯합니다.

자기(자아) 비판은 성경 말씀에도 있습니다. 다만 그 쓰임새가 굉장히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 단하려 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여기서 자신에 대한 판단이란, 믿는 자가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습관에 대해서 도덕적인 정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행동을 허용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판단을 통해 징계를 피하게 됩니다. 판단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주께서 판단하시며, 그 결과로 징계를 받게 되지만 결코 정죄를 받지는 않는다고 합니다(고전 11:32, 삼하 7:14-15, 12:13-14,고전 5:5, 딤전 1:20, 히 12:7).

“민심(백성들의 마음)이 천심(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민의 48%, 그리고 한국인의 70%가 하루라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보의 종류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맹목적인 반응만 있을뿐, 따라서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이제는 틀렸고, 오직 “성경 말씀만이 천심”입니다.

최근에 코메디언이자 영화배우인 “로빈 윌리엄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장기적인 지병인 파킨슨씨병 때문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는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월간 잡지 AARP에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투병기가 게재되었습니다. 그를 간병했던 부인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파킨슨씨병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치유는 불가능하며, 간병도 굉장히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간병으로 말미암아 간병인의 건강은 물론 물질적인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무하마드 알리”는 생존해 있습니다.

내게는 장기적인 질병과 싸울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빠른 죽음을 갈망하는 이유는, 첫째 영면(영원한 잠)을 취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계속 삶에 부딪치면 알게 모르게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나로 인하여 피곤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나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른 죽음을 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느니라"(롬 6: 7). 셋째는 나의 후손에게 물질적인 부담을 안주려는 바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 살았으니 내 마음대로 하자.”고 말합니다. 무엇을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부럽기도 합니다. 죽을 때 식구들을 피곤치 않게 하고 쉽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묘책이나 풍성한 자금이 있는 모양입니다.

종전에는 가끔 장의사에서 선전문들이 오곤 하였는데, 주로 '관' 또는 '묘지'를 사두라는 권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화장전문장의사에서 선전문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이며, 오늘은 선물이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악은 그 날에게 족하니라"(마 6: 34). 그리고 화장이 매장보다 좋다는 내용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매장에 드는 비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불현듯 어른 두 분을 화장으로 모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생전에 그분들은 화장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화장을 한 후에 한 분의 유골가루는 강물에, 또 한 분의 유골가루는 야산 중턱에 있는 꽃밭에 뿌렸습니다. 그분들의 장례 예배는 '천국환송식'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행진곡풍의 찬송가를 선별해서, 힘차게 부를수 있도록 해달라고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물론 부탁대로 장례 예배는 진행되었습니다. '죽음은 지구라는 항구를 떠나서 하늘나라의 항구에 도착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힘있고 신나게 그 여정을 축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 5:1).

나도 식구들에게 화장을 하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무덤이 열리고 자고 있던 (즉 죽어서 묻혀 있던) 사람들이 부활한다."고 되어 있는데, 무덤이 없는 나는 어떻게 되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 지리라" (벧후 3:10). 과연 매장도 필요없겠죠?

"평강의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 23).  사람의 혼(soul)과 영(sprit)이 같지 않다는 것은 그것들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히 4:12) 과 몸의 장사와 부활에 있어서 혼과 영이 뚜렷이 구별된다는 사실로 증명된다고 합니다. 고전 15:44에 보면, 육신의 타고난 몸으로 심겨서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혼과 영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죽을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영은 사람의 부분 중 하나님과 영적 일들을 아는 부분이고(고전 2:11), 혼은 애정, 욕망, 감정 그리고 능동적인 의지가 있는 부분으로 자기 자신(자아) 입니다. 사람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욥 32:8, 시 18:28, 잠 20:27). 사람은 “혼”이기 때문에 자기를 인식합니다(시 13:2, 42:5-6,11). 사람은 “몸”이기 때문에 그의 감각들을 통해 세상을 인식 합니다.

성경에 보면 죽을 때에 심신 모두가 건강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어둡지 아니하였고 타고난 힘이 줄지 아니 하였더라"(신 34: 7). 나도 모세처럼 죽을 때에 건강하게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심신을 깨끗이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숭배니라"(골 3: 5).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고후 1: 12).

몸은 비록 낡고 비정상적인 부분이 많으나 “노추”와 “노욕”을 멀리하고 건강하게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젊어서는 영.혼.육을 살찌우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읽었다면, 늙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영.혼.육을 비우기 위하여 더 열심히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 -17). 그리고 치매를 예방하고자 하는 염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박 깜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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