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나무 담장엔 푸짐하기만 한 인심이 퍼져 있었다.

뒷집에서 기르는 맨더빌이라는 꽃나무가 나팔꽃 모양의 하얀 꽃과 싱싱한 초록의 이파리를 데리고 담장을 넘어 온 탓이었다. 원예에 소질이 없는 주인을 둔 우리 뒤란이 3월부터 7월 말인 지금까지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그 꽃 덕분에 한껏 화려하기만 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나팔꽃 모양의 하얀 꽃이 빨간 동그라미로 깊숙한 가슴 안을 장식하고는 활짝 웃으며, 맑고 엷은 노란색으로 익어가는 배를 달고 있는 키가 큰 배나무 옆으로 덩굴손을 뻗어가며 다가서는 모습이 다정한 친구를 부르는 양 다정다감해 보였다. 잔잔한 바람이 담장 위를 슬쩍 쓰다듬고 지나갔다. 배나무 어느 가지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소리가 또르르 또르르 장단을 맞춰 주었다.

모처럼 쉬는 날의 늦은 아침, 커피 잔을 들고 망중한을 즐기는 내 얼굴에도 꽃만큼이나 환한 웃음이 담겼다. 일하기 위하여 집을 비우는 전후의 쫒기는 시간인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와는 또 다른 햇빛 가득한 뒤란의 풍경이 느긋한 여유로 다가와 보드랍게 내 마음을 닦아 주고 있었다. 잠시나마 복잡한 여러 일들을 잠시 잊어버리게 했다. 분주할수록 한 걸음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은 이런 귀한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이런 느긋하고 평화로운 덕분에 바쁜 나의 일상조차도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악보 속의 쉼표처럼 귀하기만 한 시간이 주어지다니,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이웃 덕에 공으로 즐기는 맨더빌 꽃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가며 인사를 보냈다. 넉넉하게 자라 주인의 뜰을 빛내 주고 담을 넘어와 내 뒤란의 분위기까지 바꿔 주고 있는 하얀 꽃들. 나팔 모양의 꽃 속에서 솟아 나오는 환희의 소리가 마음에 와닿는 듯했다. 기쁜 마음으로 오래오래 바라봤다.

꽃을 보고 있다가 울컥하니 눈물이 솟아나왔다. 꽃들 위에 허연 머리, 주름진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신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환갑을 지내고 두 달 후에 이민행 비행기에 올랐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아버지 또한 60년을 뿌리 내리고 사셨던 고향땅을 뒤로 하는 과감한 결단을 하셨던 것이다. 오직 꿈을 좇아 부푼 마음으로 떠나는 자녀들을 위하여.

몇백 년을 살아가는 나무들도 자랄수록 옮겨 심으면 적응하기가 어렵다는데, 문화와 언어까지 다른 딴 세상에 노년의 아버지는 적응하셔야만 했다. 그때는 몰랐다. 부모님께서 굳어버린 습성 때문에 다른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녀들 때문에 어려운 삶을 택하신 부모님들의 고통을 자녀인 우린 정말 몰랐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고,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묻는 그 심정을 헤아려 볼 마음조차 없었기에 정녕 몰랐다. 어쩌면 외면했을 것이다. 어떤 자녀는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일을 했고, 어떤 자녀는 두세 가지의 일자리를 오가기도 했다. 바뀐 세상 속에서 버티기 위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어야 했던 시절, 다른 일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우리의 삶은 척박했고,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어렵기만 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생존을 위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붙여본 변명이다.

둥지를 옮기신 부모님께서는 시간에 쫓기는 자녀들에게 어떤 조언도 하실 수 없었다. 둘러앉아 마주 볼 시간마저도 사치였으니까. 얼마나 나누고 싶으셨던 말들을 가슴 속에 접어 넣으셔야 했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얼마나 많은 아픔, 슬픔을 속으로 삼키고 또 삼키셨을까.

그 이민 세월은 어느덧 30년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 70년을 해로하신 어머니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셨다.
외로움과 고독을 혼자 되신 우리 아버지라고 못 느끼실까마는 늘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생활하시는 모습을 뵙노라면 모든 풍상을 몸 하나로 겪어내고 노을진 비탈길에 의연히 서있는 노송의 향기를 맡는 듯했다.

그런 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91세가 되셨던 몇 년 전 부터 그림을 그리셨던 것이다. 평소에 그림을 그리실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인 사회 복지회에서 아버지께서 살고 계시는 연장자 아파트의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중에 그림 클래스를 운영하였는데, 다리가 불편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활동이 그림인 것을 아시고 배우기 시작하셨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시는 아버지는 집안에 계실 때도 고향의 풍경을 생각해 그리시기도 하고 사진이나 그림들을 흉내내 그리시기도 했다.

난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 동안에 써놨던 글들을 모아서 아버지의 그림과 함께 책을 냈다. 모두들 아버지의 그림으로 인하여 내 글이 빛난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아버지께서는 30여 년의 어려운 이민의 삶을 축척하셨고, 한인 사회 복지회의 여가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소질을 90대에 되찾으셨다. 그 소중한 그림을 아버지의 외로움도, 괴로움도 모른 척했던 불효한 딸이 탐냈을 때 망설임 없이 흔쾌히 넘겨주셨다.

아버지의 그런 마음은 영락없이 우리 뒤뜰로 넘어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맨더빌 넝쿨이었다. 어줍고 부족한 나의 글을 기쁨으로 장식해 주었고, 세상 속에 아버지와 딸이 만든 사랑의 하모니가 되어 작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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