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중세의 교회 (5)

VII. 교황권의 성쇠 (2)

3. 교황권은 종교 재판으로 유지되었다.

거룩한 사무소(Holly Office)라고 불리운 종교 재판소(Inguisition)는 13세기에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설립했고 그 다음 교황 그레고리 9세가 완성했다. 이것은 이단자를 조사하여 처벌하는 종교 재판소였다. 이단의 혐의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고문을 당하였고 소송 절차는 비밀이었다.

재판관이 선고하면 피고인은 관헌에게 인도되어 종신형이나 화형을 당하였고 피고인의 재산은 몰수되어 교회와 국가에 분배되었다.

인노센트 3세 시대 직후의 종교재판은 알비파에게 가장 심한 피해를 주었는데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네델란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 후의 종교 재판소의 주요임무는 종교개혁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1540년부터 1570년까지 30년 동안에 교황은 왈도파를 진멸시키려고 구십만 명의 신교도들을 사형시켰다. 종교 재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악마적인 행위였다. 이것은 교황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 내어 500년 동안 사용한 제도였다.

4. 교회의 개혁 운동

1) 투쟁과 변화
문예부흥기 중의 교회 형편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교회의 부패, 그리고 세속화는 종교개혁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 당시 어떤 형태로든 종교개혁의 전조는 꼭 필요하였다. 그러나 너무 막강한 위세를 가지고 있던 로마 교회에 그런 개혁의 불길이 당장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2) 탁발 교단
빈한한 생활을 서약하고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수도단의 수도사들을 구걸 수도사라 한다. 그 종류도 여럿인데
(1) 시도 교단은 1098년 시도가 창설하여 감독에게 승인을 받았다.
(2) 가멜산 교단은 십자군 때 이탈리아 잔류병들이 모여서 된 엄숙주의파였다.
(3) 부라몬 교단은 1121년에 건설하여 엄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설교도 하였다.
(4) 어거스틴 교단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은둔하는 수도사들이 중심이 된 교단이었다.
(5) 프란치스코 교단과 도미니코 교단은 교황이 탁발 교단으로 인정하였다.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징병 후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로 나섰다. 그레고리 9세는 그에게 성 프란치스코라는 칭호를 주었다.

민중들 중에는 그를 광인처럼 대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는 기적도 많이 행하였다. 그는 2인조 전도대(소형제단)를 조직하여 각처에 파송하였으며 인노센트 3세에게서 교단의 승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221년에는 귀족, 학자, 부자 등 3,000여 명이 그의 단원이기도 하였으며, 1224년에는 부인걸식 전도단을 창설하였는데 이것도 교황이 인준해 주었다. 그들은 탁발, 전도, 사랑의 봉사를 기본정신으로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자연계의 새들에게도 감화를 주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도미니코(1170-1221)는 스페인 출신으로 15세에 왈랜지아 대학에 입학하여 10년간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지방 감독 보좌로 있다가 1216년에 교단의 인준을 받았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카다리 교파를 교화시키려 노력하였고, 걸식 전도를 하면서 가는 곳마다 참회를 강조하였으며 사죄 권리를 행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단을 모방한 점이 많으며, 전도, 교육, 설교를 강조하였으며, 묵상보다는 활동을 강조하고, 의식보다는 봉사생활을 강조하였다.

3) 알비파는 마니교(Manicheism)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이 남부 프랑스 알비(Albi)라는 지방에서 발전되어서 그 무리들을 알비파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알비파들은 신약성경이 선신에게서 왔다고 믿는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참 모습을 소유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참된 죽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4) 왈도(Waldo)는 프랑스 상인으로서 종교심을 각성시키기 위해 성경 번역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였다. 그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를 가르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평신도 설교를 실행하였다.

5) 존 위클리프(1320-1384)는 색슨의 혈통을 타고난 영국인으로 개혁 운동의 새벽별같이 나타난 사람이었다. 옥스퍼드 대학 교비생으로 그는 후에 목사가 되었지만, 1366년에는 왕의 신부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그는 벌써 교황이 교회의 사건에 대해 최상권을 가지고 있다는 데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교회의 모든 법은 성경에 기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특별히 성상 숭배, 연옥설, 속죄표 판매하는 것 등을 반대하였다. 특히 그는 성찬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6) 존 후스(1369-1415)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의 인물로 교황 정치의 부패를 공격하였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프라하에서 가장 감화를 많이 끼치는 목회자이며 속죄권 판매의 반대자였다. 왕의 요구로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교회론을 썼으며, 그 후 왕은 그에게 교리를 설교하지 못하도록 했다. 마침내 그는 이단으로 몰려 1415년에 화형을 당했다.

7) 제롬 사보나 롤라(1452-1498)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볼로냐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서 성서와 어거스틴의 저서를 탐독하였으며 1481년에는 플로렌스로 가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진정한 종교개혁의 예언자였다. 사보나 롤라는 설교로써 대담하게 교직자들의 죄악과 수도사들의 부패상을 공박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백성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어 행정관이 되었다.

플로렌스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교황은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사보나 롤라는 정의의 결심에서 교황의 비행을 공격하였다. 마침내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그를 파문하여 백성을 미혹했다는 죄목으로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8) 1350년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교회를 개혁하려는 또 다른 시도가 일어났는데 이 운동이 공동생활의 형제단이었다. 그들은 교육으로서 교회의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 학파로부터 학문과 경건을 발전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루터(Martin Luther)는 1년 동안 그들 학교의 학생이었다. 특히 괄목한 만한 세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은 존 웨셀(John Wessel), 에라스무스(Erasmus) 그리고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이다.

존 웨셀은 그 시대의 주도적인 학자요, 사상가였으며 1445년에서 1456년까지 독일 얼푸르트 대학의 교수였다. 그 학교에서 49년에 마틴 루터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의 빛’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면죄부를 공격하였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또한 선택된 사람은 은혜로써 구원받는다고 상관된 교리를 가르쳤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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