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중세의 교회 (6)

VII. 교황권의 성쇠 (3)

4. 교회의 개혁운동 (2)

에라스무스는 대단한 학식을 사용하여 교회의 많은 병폐와 교직자들의 무지를 신랄하고 예리한 필치로 규탄했다.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달걀을 낳았고, 루터가 그 달걀을 부화시켰다고 말 해진다.

기독교 신비주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네덜란드 즈볼러 근처에 살았는데 종교 개혁 운동에 정신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썼는데, 오늘날까지 경건문학의 첫째 자리에 있는 유명한 책이다. 이 책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세상적 허영을 멀리하게 한다. 이렇듯 종교개혁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뿌리는 중세부터 있었던 것이다.

VIII. 문예부흥 (르네상스 : Renaissance)기의 기독교 문화

1. 문예부흥의 전도

샤를마뉴(742-814) 치하에서 교회는 더욱 일반적인 문화 세력이 되었다. 문화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부양했다. 학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몰려들어서 학문이 발달했다. 샤를마뉴의 학자들은 모두 성직자였다. 샤를마뉴 사후의 스콜라 학파로 대표되는 카롤링거 왕조는 학문과 더불어 예술을 부흥시켰다.

2. 기독교 문화의 변화

기독교 문화는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대의 사실적 자연주의를 버리고, 환상적이고 비실재적 요소들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미첼 고흐는 『기독교 예술의 기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중세에 성행한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예술의 특징은 형상화되고 양식화된 상징적 모자이크와 성상이다. 그들은 종교적 주제를 주로 하여 영적인 가치를 갈구하였는데 그 영성 개념을 묘사하면서 인간이 지닌 본질과 의미는 제쳐 두었다.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시대의 인적 교류는 서유럽의 여러 나라 백성들의 정신적인 생활을 자극했다. 중세 서유럽의 암흑시대는 동로마 제국과 동방 여러 지역의 문화의 영향으로 점차 걷히고 있었다. 무역과 상업이 십자군 시대에 발달하였고 많은 재산을 가진 자본가들이 학문하는 사람들을 후원하여, 고대문서 특히 희랍과 라틴어 저술을 발굴하여 학문적으로 발달시켰다. 많은 대학들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 생겼다.

이 당시의 유럽을 석권한 스콜라 철학은 희랍 사상과 기독교 교리가 혼합되어 신앙과 지성,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도미니코회의 가장 뛰어난 스승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을 저술하여 현대 가톨릭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는 신학에서뿐만 아니고 서구 문명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는데, 신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교회의 하나님께서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계시하신다는 성경적인 원리를 더 강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구 문명의 경우, 물리적 세계에 대하여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되찾아서 관찰과 탐구의 길을 통해 서구의 기술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 가진 사실과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은 예술에서 곧 나타났다.

3. 문예부흥기의 기독교 예술

미술 분야에서 이러한 변화(사실과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지오토(1267-1337) 이전의 피렌체(플로렌스)의 미술은 단조롭고 깊이가 없으며, 동로마제국, 비잔틴 예술의 약간 덜 세련된 형태였다. 사실을 그렸다기보다 종교적 주제를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지오토는 자연을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렸고, 그의 인물 묘사도 사실적이었으며 1304년에 최후의 심판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피렌체의 대표적 재벌인 메디치 가문은 로렌초(1449-1492)의 등장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는 학문과 예술을 애호하여 피렌체를 르레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게 하였다.

미술에서 특히 인본주의 사상이 득세하게 되는데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이 발달하였다.

프랑스의 푸케(Fouquet 1416-1480)의 그림 붉은 옷을 입은 동정녀는 사물을 강조하여 사람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표현되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신비한 성탄,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 강림, 알프레트 뒤러(1471-1528)의 기도하는 손이 유명하다. 수학자이며,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다재다능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 ? )는 진정한 르네상스인의 화신이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암굴의 성모,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교황 율리우스 2 세의 의뢰를 받아 1512년에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였으며,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였고, 조각가로서 그는 ‘피에타(Pieta)’, 다비드의 입상(1504)’ 등의 걸작을 통하여 인본주의의 이상인 ‘인간은 위대하도다’라는 주제를 잘 표현했다고 한다.

라파엘로(1483-1520)는 ‘아테네 학당’이라는 벽화에서 르네상스가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그는 1504년에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연구를 위하여 피렌체로 옮겨가 시스티나의 성모화 등 다수의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 1509년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고, 바티칸 궁의 벽화‘성체의 논의, 삼덕상, 파르나소스’등의 걸작을 남겼다.

렘브란트(1606-1669)는 중세를 지나 한참 후대의 인물이지만 성화에 관한 한 그는 틀림없이 최고의 미술가이다. 그도 사실적 표현의 성화들을 많이 그렸는데, 동방박사의 경배, 탕자의 귀향, 엠마오에서의 만찬, 요셉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 벨사살의 연회, 그리스도 그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포도원의 품꾼들 등이 있다.

건축에서는 동로마를 중심으로 비잔틴 모자이크 양식이 발전되어 서로마로 퍼져나갔으며 11세기부터 로마네스크(아치, 두꺼운 벽, 어두운 실내)라는 독특한 양식을 창조했다. 예, 브름스 성당 등.

그리고 곧바로 창조된 고딕(Gothic, 뾰족한 아치, 크고 넓은 많은 창문) 양식이 주를 이루었는데 고전적 고딕 양식(1150-1250)과 후기 고딕 양식(1250-1500)으로 나눈다. 이 고딕 양식으로 쾰른 대성당, 노틀담 사원(1163-1215 완공) 같은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들이 건축되었고 이 고딕 양식과 더불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전으로 돔(dome)이 있으며, 석조 부조로 성당의 외벽을 장식하고, 성당 내벽을 벽화로 장식한 아름다운 르네상스 예술의 성당들이 건축되었으며, 15세기 초 부르넬레스키가 설계한 피렌체의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대표적인 걸작이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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