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부활절이면 색깔 계란 사냥하기, 여름성경학교, 새벽송 돌기, 윷놀이로 밤새도록 왁자지껄하던 송구영신 등, 그 중에도 성탄절 연극을 잊을 수 없다. 그건 실로 연습할 때부터 흥분의 도가니다.

성탄절은 그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극적 사건이고 또 하나님께서 연출해 내신 불후의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여럿이다. 우선 아기 예수, 그 어머니 마리아, 양아버지 요셉, 천사 가브리엘, 엘리자베스와 남편 사가랴, 여관 주인, 동방박사 세 사람, 그들이 타고 왔던 낙타들, 헤롯 왕과 궁궐에 있는 신하들, 대제사장, 로마 군인들, 밤새워 빈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 호적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 오고가는 나그네들, 동네 사람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다리던 시므온, 그리고 안나 할머니...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아니다. ‘인물’이라는 말이 전혀 맞지 않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어디 사람을 뜻하는 인물인가.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또 어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낙타, 말, 양떼들이 어디 짐승이지 인물일까. 게다가 더 있다. 이 웅장한 연극을 연출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인물인가. 아니,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기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는데 성령님도 단연 인물이 아니시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에는 성삼위 하나님, 신적 존재인 천군천사들,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 게다가 여러 동물들이 있었고 또 마구간이니까 말을 먹일 음식인 마초 곧 식물들도 등장한다.

등장인물 곧 사람들 가운데는 선악을 기준으로 하여 둘로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을 돕고 기뻐하는 이들이 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일등공신이다. 동방박사들도 그 멀고 먼 데서부터 와서 경배하며 값비싼 선물을 드렸다. 천군천사가 가르쳐 준 찬양을 불렀을 목자들, 피난지의 아기 예수님을 보살폈던 이집트인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 편이었다. 그러나 아기 목숨을 끊어 놓으려던 헤롯왕, 그 신하들과 군병들, 대제사장 등 권력층, 이런 사탄의 오른팔들이 예수님을 흔적도 없이 죽이려고 했다.

연극은 무대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 탄생의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대는 어떤 조그만 마구간이었다. 조금 넓게는 작은 동네 베들레헴이었고, 좀 더 넓히면 유대 땅이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지구 위에서 생긴 일이지만 우주보다도 더 넓은 무대에서 벌어진 드라마이다. 실로, 온 하늘, 온 땅,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벌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행 26:26).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 탄생의 드라마는 바로 나 자신의 마음에서 벌어진 사건이 되어야 한다. 손바닥만한 그 좁디좁은 무대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사람의 심장은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또 한 번 기도한다.

“고요한 밤, 거룩한 이 밤에 저의 이 심장을 아기 예수님 모실 말구유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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