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하루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펴냄

 
저자는 캐나다의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에 정착해, 목욕시키고 옷 입히고 먹이고 함께하는 등 장애인 아담을 돌보면서 깨달은 것들을 『돌봄의 영성』으로 정리했다. '아담은 내 친구이자 스승이자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고백한 저자는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하다’ 즉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이 서로 조우하는 쌍방적인 관계가 ‘돌봄의 영성’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돌봄(care)이란 무엇인가? 이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애통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 속에도 들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돌봄이란, 깨어지고 무력한 사람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연약한 사람들끼리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또한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 주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계속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돌봄은 인간의 모든 몸짓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그 몸짓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하고 긍휼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용감한 고백에서 비롯된다.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내적 치유와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는 기회이다."(본문 일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 6:36)’는 예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며 저자는 긍휼에 대한 묵상을 이어간다. 긍휼은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길이며, 행동이며, 인간다워지는 것이며, 넘쳐흘러 결국 내가 복 받는 일이라고 말한다.

"긍휼을 품는 건 힘든 일이다. 힘없고 약하고 외롭고 깨어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내적 성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고난 앞에서 보이는 자발적인 반응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고난을 없애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는 능력일 것이다. 긍휼과 비판은 공존할 수 없다. 비판이란 남과 나를 구별해서 거리를 두는 행위인데, 그래서는 참으로 이웃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본문 일부)

저자가 고통에 처했을 때 ‘나는 당신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답을 내놓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고 최대한 끝까지 붙들어 주겠습니다.’ 라는 지인의 말에서 가장 큰 위안을 받았다고 말한다.

"돌봄은 고난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반응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돌보려면 희생이 따른다. 돌보는 사람이 종종 큰 대가를 치른다. 우리가 베푸는 돌봄이 사랑과 이타심의 샘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망과 의무감의 쓰디쓴 바닷물에서 나올 때도 있다. 나 자신의 삶 속에 고통의 문제가 아우성치고 있을 때는 남의 말을 들어 주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와 갈망을 들어줄 줄 알면 비로소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내 돌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깊고 섬세한 내면의 아름다움에 참으로 주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가장 평범하고 반복적인 돌봄의 실무조차 우리에게 성장의 발판이 된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고 함께해 주는 진실한 관계를 가꿀 수 있다."(본문 일부)

"사랑의 창조주는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면서 저자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긍휼의 삶이란 서로 기쁨을 주고 받는 삶이며 기쁨은 긍휼의 숨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긍휼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다. 육체적으로 고되고 소외감, 죄책감, 수치심이 들기도 하고, 환자가 나의 돌봄을 선물로 여기지 않기도 한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는 경청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이 있다. 경청은 두 삶의 만남을 인식하는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다. 경청할 때 나는 그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가지고 듣는다. 그래야 상대의 이야기에 내 삶의 중심으로부터 반응할 수 있다. 돌봄이란 고통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일이란 걸 우리는 경청을 통해 깨닫는다."

"모든 인간 관계는 본래 인류 전체와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징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돌봄과 치료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돌보는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치료에 있으면 만성질환에 걸렸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는 별로 보람을 느낄 수 없다. 우리의 힘이 모자라다거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영적인 보물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한 결과는 우리의 소관 밖이며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 진정한 돌봄은 무관심을 배제하며 냉담함과 정반대이다. 돌본다는 것은 상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 혼란, 외로움, 고립, 잊힌 존재가 된 심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무언가 ‘행동’을 취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또한 돌본다는 것은 동일한 애통이 내 마음 속에도 존재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돌봄은 곧 긍휼이다. 돌봄은 상대가 내 형제자매라는 진리, 나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진리를 붙드는 일이다. 치료는 불가능할 때가 많아도 돌봄은 언제나 가능하다... 돌봄을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경험해야 한다. 돌봄은 상대를 가장 소중한 자아에 눈뜨게 해준다. 그런데 그 자아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돌봄을 받고 있으며, 본래 죽음의 세력을 벗어나 영원히 살도록 지어졌다. 고로 돌봄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성령은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요 6:20)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신다. 내가 믿기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통제 욕구를 내려놓으라. 그러면 내 마음의 깊은 갈망을 내가 이루어주겠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리 안에서 잠시 쉬라.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고 내게 속한 자다.” 우리의 참 정체성의 근원이신 사랑의 주님과 날마다 교제를 나누면 우리 삶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기를 원한다. 어려운 사람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 한다. 슬픈 사람을 위로해 주고 싶고 아파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다. 이런 갈망은 잘못된 게 아니다. 오히려 고결하고 은혜에 찬 갈망이다. 하지만 내가 섬기려는 대상에게서 오히려 나에게로 하나님의 복이 온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의 도움은 단기간으로 그칠 것이며 결국 탈진에 빠질 수 있다. 결국 돌봄이란 돌보는 사람이 상대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복은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천국이란 결국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우리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복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복을 주려고 기다린다."(본문 일부)

헨리 나우웬은 1932년, 네덜란드 네이께르끄에서 태어났으며,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메닝거클리닉에서 종교학과 정신의학을 공부했다. 30대에 노트르담 대학 심리학부와 예일 대학 신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헨리 나우웬의 삶의 행보는 1981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그 무렵 그는 ‘하나님 사랑’에 빚진 자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품고 페루의 빈민가로 들어가 그곳 민중들과 함께 지냈으며, 이후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에서 강의를 했으나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1986년부터 1996년에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캐나다의 발달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어가 장애인들과 함께했다. 그가 저술한「삶의 영성」, 「귀향의 영성」,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영적 발돋움」, 「영성 수업」,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춤추시는 하나님」, 「영혼의 양식」,「예수님의 이름으로」(이상 두란노) 등 40여 권의 책들은 22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현대인들에게 ‘내적 자유’의 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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