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피쉬'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두 번 감상했다. 보고 또 보아도 재미있어서 기억을 되새김질해 보는데, 뜬금없이 산타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속 사진이 두 장 있다. 한 장은 유치원 시절의 것이다. 커다란 산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는 장면이다. 무서웠다는 느낌에 대한 기억만 선명하다. 두 번째 사진은 방안이다. 벽에 양말 한 짝 걸려 있다. 선물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고 쓰다만 카드를 기억한다. 카드에 글을 쓴 이가 산타 아닌 엄마였고, 내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쓰다만 카드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산타와 관련된 추억의 사진 전부이다. 기억 자체인지 엄마의 이야기가 가미된 것인지 불확실하다.

성탄절의 산타 할아버지는 가지고 싶은 선물과 동의어였다. 정에 굶주렸던 어린아이에게 선물은 사랑과 동의어였다. 술 먹고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가 손에 들고 오는 무엇. 특별한 날에, 혹은 당신이 나를 서운하게 만든 그런 이유로 내 손에 들려지는 무엇, 내 입에 들어가는 무엇, 그것은 그저 선물이었다. 착한 일을 하지 않아도, 부모가 같이 놀아 주지 못해서, 부부 싸움을 해서, 어린 나를 떠나서 미안하다고 혹은 내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그것들에는 늘 선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후 나는 선물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를 배부르게 먹은 지금은 덜 집착하게 되어 다행으로 여기는 중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커다란 메기라는 다소 신화적인 원형에서 찾는데, 뜬금없이 떠오르는 산타라니, 선물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선물 속에서 존재를 확인했다는 말인가. 존재보다는 관계를 확인했다는 말이 맞겠지? ‘빅 피쉬’의 주인공은 그의 생애에서 만난 이들을 모두 신비한 이야기 속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 쌍둥이 자매는 샴쌍둥이로, 서커스 단장은 늑대 인간으로 변했지만, 그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을 아는 사람들 치고 그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인공에게 이야기는 가짜가 아니다. 주인공은 관계라는 선물을 주고 받고, 다시 신화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이웃과 가족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아들은 진실로도 사실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허풍 내지 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아들 부부가 방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성인이 된 아들 역시 작가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을 이야기꾼이라고 부른다. 타고난 입담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소유한 아버지는 자신과 이웃의 삶을 딱딱한 일지로 만드는 걸 거부한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아들 윌의 결혼 파티에서 에드워드 블룸(앨버트 피니)은 윌이 성장하는 동안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를 하객들에게 들려 준다.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결혼 반지를 삼켜 버렸다는 등, 출산할 때부터 자신의 파워가 엄청났다는 등의 이야기다. 윌은 아내 조세핀에게 아버지가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믿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아버지 속에서 나 자신을 보지 못했고, 내 안에서 아버지 자신을 보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들 같았다.”고 윌은 말한다. 결혼 후 아버지와 소원해진 상태로 3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서 윌은 임신한 아내 조세핀과 함께 고향인 앨라배마로 돌아온다. 비행기 안에서 윌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그렇게 현실의 아버지 모습과 옛날 이야기 속 아버지의 모습이 씨실날실로 엮인다. 어릴 적의 에드워드(아버지)는 호기심 반 담력 겨루기 반으로 친구들과 마녀의 집을 찾아간다. 마녀의 유리 의안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영화는 마녀의 의안에 나타난 두 친구가 죽는 영상만 관객에게 보여 주고 주인공의 것은 보여 주지 않는다. 물과 관계되어 있다는 암시만 준 것 같다.

 
에드워드의 성장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는 운동선수가 되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의 해결사가 되지만, 그의 야망에 비해 고향인 애쉬턴 마을은 너무나 작다. 어느날 마을에 침입한 괴물로 오인 받은 거인의 정체를 밝힌 공로로 아버지는 마을의 영웅이 되지만 칼이라는 이름의 거인과 함께 마을을 떠난다.

여행 중에 칼과 아버지는 다른 길을 택한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는 길 아닌 길, 포장되지 않은 숲속 길을 택한다. 천신만고 끝에 숲속에서 유령 마을을 발견한다. 그곳은 주민들이 허공에 신발을 걸어놓고 맨발로 사는 일종의 낙원이다. 시장 부부는 에드워드를 환영하며, 그들의 마을에서 에드워드가 살도록 되어 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라 말한다. 시장의 어린 딸 제니는 에드워드의 신발을 벗겨 허공의 줄에 매달아 버린다. 한밤중에 에드워드는 강에서 인어도 보고, 시인 노더 윈슬로우를 만나 그의 시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정착을 원하지 않는다. 언젠가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에드워드는 맨발로 마을을 떠나고 거인과 재회한다.

 
에드워드는 거인 칼을 캘러웨이 서커스에 취직시키는데 그곳에서 한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애드워드는 서커스 단장과 거래를 한다. 서커스에서 무보수로 일하고 임금 대신 그녀에 관한 정보를 알려 달라는 것이다. 3년 후 에드워드는 그녀에 관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단장이 늑대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첫눈에 반한 여성의 이름은 샌드라 템플턴, 오번 대학의 학생이다. 에드워드는 기숙사에 있는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에드워드의 어릴 적 경쟁자인 돈 프라이스라는 약혼자가 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수선화를 밭 째로 옮겨 놓는 등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이를 안 약혼자가 에드워드에게 폭력을 휘두르자, 샌드라는 파혼을 선언하고 둘은 결혼에 골인한다(참고로 돈 프라이스는 마녀의 눈알에서 본 대로 젊은 나이에 변기에 앉아 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에드워드는 군에 징집되어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낙하산을 타고 쇼를 관람하고 있는 북한군 진영에 들어가 중요한 서류를 훔치는데, 언예인인 샴쌍둥이 핑과 링 자매에게 들킨다. 그는 미국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빠져나간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출장 세일즈맨이 된다. 세일즈를 하는 동안 유령 마을 출신의 노더 윈슬로우 시인과 재회하는데, 그는 은행 강도가 되어 있다. 에드워드는 시인의 부탁으로 뜻하지 않게 강도짓을 돕게 되지만, 금고는 비어 있다. 은행원은 파산 소문을 내지 말아 달라고 오히려 사정한다. 에드워드의 조언으로 시인은 강도짓을 끝내고 월가로 들어가 성공하며, 감사의 뜻으로 꿈에 그리던 집을 살 수 있는 수표를 보내온다.

 
아버지의 이런 이야기에 시큰둥한 윌은 자신은 더이상 꾸며낸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이가 아니라면서 사실을 말해 달라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이야기꾼이라는 걸 강조할 뿐이다. 아버지의 서류와 물건들을 살피던 윌은 아버지의 자취를 직접 찾아나선다. 유령 마을도 발견하고 그곳에서 제니를 만나 파산한 마을을 경매로 사들여 재건하는 등 아버지가 도움을 준 사실을 알게 된다. 윌은 아버지가 제니와 불륜 관계였는지를 질문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에드워드는 어머니 외에는 어떤 여성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답해 준다. 그러면서 “아버지식으로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집으로 돌아온 윌은 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다. 그곳에서 주치의로부터 출장 가느라 아들의 출생과 함께하지 못해 아버지가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의사는 개인사에서 이야기와 현실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이야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침내 윌은 말을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당신이 원하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물려받아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아름다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게 아름답다. 병원에서 탈출하여 자동차로 강가에 도착하고 아내에게 자신이 삼켰던 결혼 반지를 돌려 주고, 가족과 지인의 환송 인사를 받으면서 아버지는 윌의 품에 안겨 강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본래 모습이었던 빅 피쉬로 돌아간다. 아들의 이야기에 만족한 아버지는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에드워드의 장례식에는 엣 친구들이 속속 도착해 아버지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윌은 아버지의 크고 작은 일상이 멋진 판타지들로 탈바꿈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윌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버지는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빅 피쉬(Big Fish)’는 다니엘 월러스의 동명 소설(1998)을 2003년에 콜럼비아 픽처스에서 판타지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팀 버튼이 감독하고 이완 맥그리거, 앨버트 피니, 빌리 크루덥, 제시카 랭, 마리옹 코티야르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산타와 선물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액수 고하를 막론하고 돈으로 미안함과 사랑을 표현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타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가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더라면, 돈이나 선물로는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이 가슴에 숭숭 뜷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말수 적은 아버지의  '너는 글을 잘 쓰잖니'라는 한 마디 칭찬 때문에 아직도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풍성하면 할수록 나 또한 자식에게 더 많은 마음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기억하려 하고 글로 남기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쓰다만 카드 한 장, 아들이 부러뜨린 솔빗 하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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