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멈추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일손을 맞춰야 하는 부산한 세탁소의 일들이 정리되었다. 손님이 간간이 들어오는 시간을 제하면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평화의 시간이었다. 서쪽을 향한 가게의 유리문으로 길 건너 넓은 공원을 배경으로 서있는 식품점이 눈에 들어왔다. 잎들이 모두 떨어진 겨울 공원의 나무들까지 고요하기만 한 공기 속에 동양화가의 작품인양 잔가지 하나하나로 묵화를 그리고 서서 나의 눈길을 부르고 있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때론 구름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불타는 노을을 만들기도 하여 날마다, 수시로 다른 얼굴을 한 하늘이 나를 만나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 쌀쌀하게 느껴지기에 신선하고 바삭한 공기를 맛보고 싶어서 창을 열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냄새. 바로 소나무 향이었다. 식품점 주차장 한쪽은 크리스마스 시즌엔 임시로 크리스마스 트리에 쓰일 소나무 장터가 된다. 바로 그곳에서 풍겨오는 냄새였다. 이 냄새는 매년 12월 초부터 크리스마스 때까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신선한 그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으면 순식간에 고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생각에 빠졌다. 어릴 적에 살았던 시골에선 추수가 끝나면 겨울 준비 중 하나로 소나무의 잔가지치기를 했다.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서 산에 있는 소나무 아랫부분의 가지들을 잘라 주었다. 베어낸 소나무 가지들은 다발로 묶어서 마당 옆에 큰 가리를 만들었다 담장만큼 높고 길게 눌러앉아 한 해의 땔감이 되었다. 아직 마르기 전에 퍼져 나오는 진한 향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골목까지 덮었다. 방과 후 십 리 길을 걸어서 피곤한 몸으로 당도한 집골목에서 반겨 주던 소나무 향은 생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소나무향을 음미하며 고향 골목을 서성이고 있는 내게 또 다른 고향의 모습을 전해 주느라 아련한 쇠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식품점 출입구에서 차가운 손을 불어가며 흔드는 구세군의 종소리였다. 눈을 감은 내 머릿속에는 외양간의 소 한 마리가 들어섰다. 소의 목에 걸려 있던 쇠풍경 소리를 들은 것이다. 봄, 여름, 가을 동안의 긴 노동에서 놓여나 한가한 몸짓으로 큰 눈을 가만가만 움직이며 여물을 먹고 있는 황금빛 소. 살금살금 머리를 흔들 때 울려 나오는 고즈넉한 쇠풍경 소리와 더불어, 정지용 시인의 표현대로 ‘게으른 울음’ 음~~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풍성하게 흰 눈을 이고 있는 시골집의 평화로움과 묘한 조화를 만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두려움이 없었고, 포근하기만 했던 고향의 겨울 품에 푹 안기고 말았다.

 
갑자기 따악, 따악, 따악 망치소리가 들려왔다. 식품점의 담과 공원을 둘러선 키 큰 나무숲을 두루 돌아서 울려와 작은 메아리까지 껴안고 가게의 열린 문안으로 들어오니 쇠풍경 소리와 기막힌 화음이 되었다. 길 건너 식품점 앞에선 누군가가 자기의 거실을 장식할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른 모양이었다. 판매하는 직원이 나무 밑부분에 십자 모양의 막대기를 붙이는 망치 소리였다. 불같이 피어오르는 석양에 건너편 산에서 누군가 나무 찍는 소리, 도끼라는 사람이 만든 도구가 아니라 산속에서 저녁을 알려 주는 목청 큰 새 소리라는 착각이 들었다. 이맘때 쯤이면 골목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옹기종기 이마를 마주 대하고 있는 지붕들마다 붙어 있는 굴뚝들에서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여유를 부리며, 겨울 산이 만드는 부드러운 선과 대조를 이루며 곧고 높게 피어오르고...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환하고 또렷한 고향 풍경을 선율로 표현해 봤으면.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길 수만 있으면, 이따금씩 들려오는 풍경 소리와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망치 소리 그리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소리’ 그 주변에 퍼져 흐르는 소나무의 향을, 하늘을 향하여 연기를 올려 보내며 흰 눈을 이고 있었던 유연한 지붕들이 주는 감동을 소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악가를, 붓으로 그려 낼 수 있는 화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지만 소나무 냄새와 풍경 소리, 망치 소리가 만들어준 티켓으로 눈만 감으면 삽시간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그때 그곳으로 여행할 수 있으니 난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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