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멈추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일손을 맞춰야 하는 부산한 세탁소의 일들이 정리되었다. 손님이 간간이 들어오는 시간을 제하면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평화의 시간이었다. 서쪽을 향한 가게의 유리문으로 길 건너 넓은 공원을 배경으로 서있는 식품점이 눈에 들어왔다. 잎들이 모두 떨어진 겨울 공원의 나무들까지 고요하기만 한 공기 속에 동양화가의 작품인양 잔가지 하나하나로 묵화를 그리고 서서 나의 눈길을 부르고 있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 때론 구름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불타는 노을을 만들기도 하여 날마다, 수시로 다른 얼굴을 한 하늘이 나를 만나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 쌀쌀하게 느껴지기에 신선하고 바삭한 공기를 맛보고 싶어서 창을 열었다.
소나무향을 음미하며 고향 골목을 서성이고 있는 내게 또 다른 고향의 모습을 전해 주느라 아련한 쇠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식품점 출입구에서 차가운 손을 불어가며 흔드는 구세군의 종소리였다. 눈을 감은 내 머릿속에는 외양간의 소 한 마리가 들어섰다. 소의 목에 걸려 있던 쇠풍경 소리를 들은 것이다. 봄, 여름, 가을 동안의 긴 노동에서 놓여나 한가한 몸짓으로 큰 눈을 가만가만 움직이며 여물을 먹고 있는 황금빛 소. 살금살금 머리를 흔들 때 울려 나오는 고즈넉한 쇠풍경 소리와 더불어, 정지용 시인의 표현대로 ‘게으른 울음’ 음~~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풍성하게 흰 눈을 이고 있는 시골집의 평화로움과 묘한 조화를 만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두려움이 없었고, 포근하기만 했던 고향의 겨울 품에 푹 안기고 말았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환하고 또렷한 고향 풍경을 선율로 표현해 봤으면.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길 수만 있으면, 이따금씩 들려오는 풍경 소리와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망치 소리 그리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소리’ 그 주변에 퍼져 흐르는 소나무의 향을, 하늘을 향하여 연기를 올려 보내며 흰 눈을 이고 있었던 유연한 지붕들이 주는 감동을 소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악가를, 붓으로 그려 낼 수 있는 화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지만 소나무 냄새와 풍경 소리, 망치 소리가 만들어준 티켓으로 눈만 감으면 삽시간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그때 그곳으로 여행할 수 있으니 난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