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estion that never goes away

필립 얀시 지음 / 규장 펴냄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는 필립 얀시의 최신작으로, 2012년에 방문한 비극적인 세 지역에서 떠오른 질문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는가?”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를 쓴 이후에도 고통에 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독자들은 계속 편지를 보내오고, 비극이 일어나는 곳마다 저자에게 설교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저자는 비극적인 세 곳, 4년에 걸쳐 전기도 연료도 음식도 물도 없이 주민들이 포위 공격에 시달린 사라예보와 총기 난사 사건으로 초등학생 스무 명이 사망한 커네티컷 주 뉴타운의 초등학교와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을 방문하고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세 지역의 비극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양적인 관점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개인들뿐이고, 그들은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하고 고민할 뿐이다.

‘대부분의 성경 기록자들은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를 끌어안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 이 세상은 원수 사탄의 영토이다. 즉 거짓의 아비요 재앙의 천재인 사탄이 다스리는 곳이다. 사단의 거짓말에서 우리가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임금 사단이 세상의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해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권위 사칭을 비웃지 않으셨다. 다만 그분은 손쉬운 해결책의 유혹을 거부하고 대신 더 느리고, 어렵지만 영원한 해결을 선택하셨다.’(p.5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멸하실 때가 올 거라고 믿는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개입이다. 욥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큰 그림’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작은 그림’을 살펴보고 온갖 불신앙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미래로 가서 되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보는 것이다.‘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은 회피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은 미래의 재앙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지금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신약의 모든 기록들은 고통의 원인에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점을 옮긴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고통당하는 자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쁨의 순간보다 슬픔의 순간에 더 많은 신뢰가 생긴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일본의 쓰나미 재앙이 무기력하던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원봉사를 하고 시민 운동을 벌이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일본뿐 아니라 엄청난 비극을 겪은 이들은 이웃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 속에서 고통을 극복했다면서, 동시에 예수님처럼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웃의 슬픔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보다 더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세의 교회는 7대 대죄와 대칭되는 ’7대 자비‘를 가르쳤다. 굶주린 자를 먹이는 것,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벌거벗은 자를 입히는 것, 집 없는 자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것, 병자를 방문하는 것, 사로잡힌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 죽은 자를 묻어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 이후의 교회는 7대 영적 자비를 가르쳤다. 무지한 자를 가르치는 것, 의심하는 자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 죄인들을 책망하는 것, 억울한 일을 참고 견디는 것, 내게 잘못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용서하는 것,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고통의 이야기라면서 저자는 예수님의 경우를 보고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들 편에 서신다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하나님 임재의 확신과 예수님의 모범 자체가 악의 존재 이유에 대해선 답을 주지 않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놓는다고 강조한다. 저 멀리 있는 분, 이 땅의 고통에 무감각한 분이 아니라 이 땅의 고통을 몸소 겪길 원하시는 분, 우리와 자비 가운데 연합하시는 분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고통 그 자체를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든 고통과 고난과 좌절과 실망은 극복되거나 더욱 높은 목적에 선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복음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러라”(롬 5:3,4).

‘성경 전체가 속량의 이야기다. 아담은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살인을 한 가인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사람들은 신앙적 뒷걸음질과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 살인자, 간음한 자, 부패한 왕 같은 사람도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속량의 죽음이었다. 고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일어나는 속량적 변화 때문에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다.'

‘그 무엇도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보상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참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에는 가혹하게 느껴지겠지만 결국에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이미 떠난 사람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유대를 유지해 준다. 하나님께서 그 공백을 메워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분은 내버려 두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우리의 과거의 서로간의 교제를 계속 살아 있게 할 수 있다.’(디트리히 본 회퍼)  (...) 슬픔은 사랑과 고통이 만나는 지점이다.(p.177)

저자는 두 가지 보편적인 문제인 마음 속의 악과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방법을 택하시지 않고 대신 악이 넘치는 곳에 사는 우리를 찾아와 악의 희생자 중 하나가 되는 방법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셨고 대신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악을 용서하고 악의 피해를 치유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절망과 고난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세상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4,5).

죽음아 교만을 떨지 마라!
어떤 이들이 너를 가리켜
강하고 두려운 존재라고 불렀지만
너는 그런 존재가 못 된다
짧은 잠이 한 번 지나면
우리가 영원히 깨어날 것이니
너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아, 네가 죽을 것이다!(존 던)

마지막으로 저자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세 가지 답을 제시한다. 성경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다. 첫째, 성경은 고통에 빛을 비추어 준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고통의 속량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교회 안에, 즉 그분이 이 땅에 대리자로 파견하신 집단 안에 계신다. 세 번째는 미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발견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새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

‘기독교는 고통을 줄여 주는 종교가 아닌 것 같다. 기독교는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맞서고, 헤쳐 나가며 일하여 결국에는 그것을 승화시키도록 힘을 준다.’(테리 웨이트)

저자는 디트리히 본 회퍼의 ‘죽음이 자유로 가는 길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축제’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의 말이 틀렸다면 우리에게 소망은 없으며, 그의 말이 맞다면 축제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으로부터도 선을 만들어내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심지어 가장 나쁜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이 땅의 모든 일이 결국 선을 이루는 데 기여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위기의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저항의 능력을 주실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능력을 미리 주시지는 않는데, 그래야 우리가 자신을 믿지 않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분의 깊은 뜻을 믿을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실수와 실패조차 헛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다루시는 것이 우리의 가장된 선행을 다루시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무시간적 운명’을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분은 우리의 정직한 기도와 책임 있는 행동을 기다리시고 또 그런 기도와 행동에 응답해 주신다고 믿는다.‘(디트리히 본 회퍼)

필립 얀시는 저널리스트답게 객관성을 기초로 심오한 인생의 문제와 신학적 주제들을 담백하게 풀어나간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의 안내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지난 20년간 청년들을 위한 <캠퍼스 라이프> 잡지와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의 편집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왔으며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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