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근세의 교회 (2)

I. 종교 개혁 시대 (2)

3. 존 칼빈(John Calvin) (2)

1532년 4월에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를 출판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그의 학재와 총명을 보여 주었다. 그는 1533년 경에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급격한 구원의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총장이 되었을 때 취임 연설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이 루터의 개혁을 제창한 것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려지자 콥과 피신을 하였다. 1534년 노용에 돌아와 성직을 사퇴하고 잠시 투옥되었다가 방면된 후 바젤에 왔다. 그는 26세 때 『기독교 강요』초판을 출판하여 프란시스 1세에게 봉정했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가장 조직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이었다.

그는 1559년에 『기독교 강요』최종판을 4부로 출판했다. 제1부는 창조의 섭리와 지배자로서의 하나님을 취급하였고, 제2부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제3부는 성령, 제4부는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취급하였다.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고,‘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말했다. 칼빈은 처음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떠나기를 원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보고 교회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작정하게 되었다. 칼빈은 율법과 의무를 의식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어떤 자는 구원으로, 어떤 자는 멸망으로 예정했다는 이중 예정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사람이 구원을 목표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칼빈의 주요 사상은 1) 전적 타락, 2) 무조건 선택, 3) 제한된 구속, 4) 불가항력적 은총, 5) 성도의 견인 등이다.

4. 알미니안 교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우스(1560-1609)를 추종하는 제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신학적 논쟁이다. 이에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이 전통교회의 답변으로 이들의 신학 이론을 반박한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불리운다. 알미니우스는 네덜란드 출생으로 라이든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조직한 알미니안파 신앙 5개조는 칼빈이 주장하는 교리에 전적으로 상반된 학설이다. 알미니우스는 칼빈이 확증해 놓은‘하나님은 누가 은혜를 입고 누가 은혜를 부정할지를 결정해 놓으셨다’는 신학적 논지(예정론)를 부정했다.

알미니안 교리는
1) 선택 교리를 거부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으며, 그리스도는 전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2) 지옥에 가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3) 자기 구원에 대하여 성령의 확증을 얻을 수 있다.
4) 원죄는 믿지만 완전 타락을 믿지 않는다.
5) 이신득의 경험자도 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상 알미니안 학설은 칼빈주의와 더불어 개혁교회의 중요한 학설이 되었고 존 웨슬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장로교적 입장,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일관성이 있다. 고대 기독교의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사이의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칼빈과 알미니안의 논쟁에서도 칼빈주의의 신앙은 알미니안주의보다 덜 합리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킨다는 기독교 기본 진리에 더 분명하고 철저했으며, 다른 면에서 보면 신적인 관점에서 강조된 기독교가 인간적이고 이성적으로 변화된 기독교를 제약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살게 하시는 비타협적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II. 유럽 각국의 종교개혁

1. 영국의 종교개혁

1) 영국 국교회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개혁 운동은 1525년, 윌리암 틴데일(Tyndale)이 신구약 성경을 헬라어 원전에서 영어로 번역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의 개혁 운동은 헨리 8세(1509-1514), 에드워드 4세(1547-1553), 메리(1553-1558),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그리고 제임스 1세(1603-)를 거치는 동안 반전이 계속되었다.

헨리(Henry) 8세는 1534년 영국 국회에서 왕이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수장령(Act of Supremacy)를 제정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Edward) 4세는 1547년, 성찬식에서 떡과 더불어 포도즙에도 참여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사제들의 결혼을 위한 법률도 제정하였다. 에드워드 4세의 첫 기도서『The First Prayer Book of Edward IV』를 간행했는데 오늘날까지 영국교회의 기도의 책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의 여왕 메리(Mary)는 영국의 종교 개혁을 뒤로 돌려놓았다. 종교개혁을 주도하던 감독 휴 래티머(Hugh Latimer),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그리고 캔터베리의 대감독,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까지도 화형에 처하였고, 1558년 11월 17일까지 거의 300명 가량을 화형에 처하였다.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계승해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예배를 정하였다. 이를‘엘리자베스 결정’이라고 부르며, 영국 국교회는 발전되기 시작했고, 영국에서의 가톨릭 세력은 아주 작아지게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를 계승한 제임스(James) 1세는 청교도들과 국교회 감독들의 협의회에서 요청한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허락하였다. 이것이‘흠정역’(Authorized Version : 영국, The King James Bible : 미국)이며, 1611년 출간되었다.

2) 개혁교회(Reformed Church)

1581년 영국의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에 의하여 교회가 조직되었는데, 교회와 예배에서는 칼빈주의를 채택하였고, 정치에 있어서는 각 교회가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와 모습을 달리함으로써 분리주의자라 불리었으며, 1604년 영국왕 제임스 1세때 박해 때문에 네덜란드 라이덴(Lyden)으로 이주하였다.

청교도 혁명을 주도한 크롬웰(1599-1658) 치하에서 개혁교회는 전성기를 만났으나, 왕정복고에 의하여 새로운 박해의 긴 시대가 뒤따르게 되었고,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28년에 이르러서야 비국교파에 대한 특별법이 폐지되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박해를 받는 동안에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퀘이커교 등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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