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2)

셔우드의 교회 순방 계획에 적힌 첫 교회는 뉴욕 빙햄턴에 있는 태버나클 감리교회와 리버티 감리교회였다. 태버나클 감리교회는 프레드 해스킨즈(Fred Haskins) 여사를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해스킨즈 성경반’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해스킨즈 여사는 별세할 때까지 Dr. 홀 부부가 조선에서 의료 선교 사업을 할 수 있게 경제적 책임을 져준 분이다. 이 성경반에서도 계속 Dr. 홀 부부의 선교 사업을 후원해 주고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다.

셔우드 홀의 어머니는 조선에서 은퇴한 후 리버티에서 작은 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셔우드는 그곳을 방문해 어머니도 뵙고 오랫동안 어머니의 의료 선교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리버티의 친지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Dr. 홀 부부가 안식년 휴가를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자주 벤트너에 와서 Dr. 홀 부부가 집을 비우면 여러 날씩 아이들을 돌봐 주곤 했다.

메리안은 뉴욕에서 부인과와 소아과 대학원 과정을 등록해 그동안 발전한 최신 의학을 공부했다. 메리안의 공부가 끝나자 셔우드도 트뤼도 결핵학교(Trudeau School of Tuberculosis)의 고급반에 등록했다. 이 반은 뉴욕 주의 에디론덱산에 있는 레이크 사라낙(Lake Saranac)에서 1939년 5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 열렸다.

이 학교 원장은 바로 닥터 에드워드 리빙스톤 트뤼도의 아들로, 그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85년, 미국에 처음으로 결핵 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도 결핵 환자였다. 그러나 스스로 병을 치료, 완치함으로써 결핵을 이기려면 휴식, 영양식, 맑은 공기, 그리고 적당한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최초의 요양원 건물이었던 작은 집은 훗날 ‘The Little Red’로 불렸다. 그 집은 지금도 설립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Dr. 에드워드 트뤼도가 결핵 치유의 새 장을 열기 전까지는 환자들을 어두운 집안에 가둬 두고 유리창과 문을 꼭꼭 잠가 공기가 통하지 못하게 했다.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하여 환자들의 기침에서 전염되는 병을 막자는 것이었다. Dr. 트위도는 자기 동생이 결핵에 걸려 죽는 것을 지켜 봤고 자기도 이제 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맑은 공기를 깊숙이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햇볕을 그의 방에 밝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추운 날씨에도 사냥과 낚시를 다녔다. 사람들은 환자가 야외에서 그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그는 결핵을 이겨냈다.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결핵에 걸려서 이곳 사라낙 호수의 요양소를 찾아왔다. Dr. 트뤼도와 좋은 친구가 됐지만 그는 말썽꾼 환자였다. 스티븐슨은 추위를 싫어해서 방 속에 틀어박혀 문과 유리창들을 꼭꼭 닫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Dr. 트뤼도는 강제로 문을 열어 요양원 규칙을 따르게 하면서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한다.

Dr. 에드워드 트뤼도는 1915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에디론덱 요양원은 그가 죽은 후 ‘트뤼도 요양원’으로 불렸다. 그 후 근방에 작고 초라한 요양원, 호화판 요양원 등이 세워졌는데, 요양원마다 각각 특징이 있었다. 어떤 곳은 외과적 수술을 위주로 했고, 다른 곳에서는 일반 치료를 주로 했다.

Dr. 에드워드 트뤼도의 아들로 결핵 학교의 교장인 Dr. 프란시스 트뤼도(Francis B. Trudeau)는 근방에 여러 다른 요양원을 대학원 학생들에게 개방해서 요양원마다 각각 다른 치료 방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셔우드는 각양각색의 치료법을 연수할 수 있는 이 현장 실습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Dr. 홀 부부가 방문했던 요양원들 중 아주 고급스러운 곳은 미국 연극 배우 조합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이었다. 이곳은 환자들의 안락함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 모양이었다. 유리창들은 모두 자외선만을 통과시키는 특수 유리였고, 환자들의 부름에 언제나 뛰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의료진 숫자도 많았다. 게다가 회복기의 환자들을 위한 아름다운 극장까지 있었다.

Dr. 프란시스 트뤼도는 Dr. 홀 부부에게 모든 결핵 치료 방법을 집중적으로 재확인하여 정리하게 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결핵 투병 생활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그때 함께 배운 학생들은 약 100명이었는데 미국과 캐나다의 각처에서 온 사람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서로 친해진 학생들과 많은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정규 과정 이외의 지식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트뤼도 요양원은 상당히 보수적인 치료 방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인 편이어서 그 방법을 인정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더 잘 볼 수 있게 결핵간상균을 착색하는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또한 결핵과 다른 증상을 엑스레이 사진에서 판별하는 법을 전문가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이 구분을 잘못하면 엉뚱한 진단을 내리게 되었다. 매우 열띤 토론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뉴모도랙스 치료법(Pneumothorax Treatment) 사용에 대한 문제였다. 부주의로 살균하지 않고 이 방법을 시행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해서 폐의 공동에 고름이 생기는 거였다. 모두들 열띤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은 좀더 조심스럽게 이 방법을 응용해야 된다는 것뿐이었다. Dr. 홀 부부는 트뤼도 요양원의 의사들이 능숙하게 이 방법을 시술하는 모습을 참관할 수 있었다.

연수가 끝나자 셔우드는 곧 오하이오 주로 가서 마운트 유니언 대학의 20주년 졸업식에 참석한 다음 이 지방 교회들을 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이 기회에 Dr. 홀 부부를 후원해준 또 하나의 교회인 클리블랜드의 세비어 교회도 방문했다. 이 교회는 1931년 4월부터 조선에서의 Dr. 홀 부부의 의료 사업을 여러모로 도와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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