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3)

1939년 6월은 셔우드의 어머니가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35주년을 맞는 해였다. 학교에서 축하식이 있어서 셔우드는 메리안, 윌리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가서 이 식에 참석했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1889년에 졸업한 아홉 명의 졸업생과 함께 금메달을 받았다. 그 해의 졸업생은 모두 41명이었는데 셔우드의 어머니가 가장 어렸다고 한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1889년에 찍은 동창생들의 단체 사진과 교수들의 사진을 갖고 갔다. 그 교수들 중의 한 사람인 Dr. 킨(W. W. Keen)은 셔우드의 어머니가 학생이었을 때의 일화를 들려 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학생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1887년 5월이었는데 아주 특이한 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너무나 유별난 수술이어서, 수술 역사상 그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어느 날 목에 결핵성 내분비선 이상이 있다며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왔어요. 그 증세가 거의 농양이 되어가고 있어서 제거 수술을 권했답니다. 학생은 그 자리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대답하더니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거였어요.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마취는 받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이봐요. 아마 학생은 이 수술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수술은 말이죠,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귀에서부터 유방 밑의 뼈까지 절단한 후에 쇄골을 따라 어깨까지 다시 절단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절단된 사이의 넓은 피부를 잡아올리고는 그 밑에 있는 분비선들을 인후부의 혈관, 경동맥, 그리고 목에 있는 수많은 신경 조직들에서 떼어내야 합니다. 아픔을 참지 못해 몸을 움직이게 되면 수술 칼이 어디를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
“잘 알고 있어요. 어떤 아픔일지라도 참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아무튼 마취는 거절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전 뉴욕의 헨리 샌즈 교수로부터 두 번이나 같은 수술을 받았거든요. 한 번은 에테르로 마취했고, 또 한 번은 클로로포름으로 했는데 수술이 끝난 뒤에 통증이 너무 심했어요. 전 아예 수술할 때의 아픔을 견디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습니. 반드시 그 마취제를 써야 한다면 전 수술을 포기하겠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코케인이라는 새로운 마취제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럼 그걸 대신 써볼까? 얼마나 마취 효과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에테르나 클로로포름만 아니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습니다. 며칠 후에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피부를 절개한 후 내분비선을 떼어내려고 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학생더러 저에게 확대경을 하나 갖다달라고 해주시겠어요? 수술하는 것을 관찰하고 싶습니다.'라고 그 학생이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잠시 동안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한 시간 반 동안 마취제 없이도 겁내지 않고 견디겠다고 했으니 자기가 수술 받는 모습도 당연히 두려움 없이 관찰할 수 있으리라고요. 한 시간 이상 동안 그녀는 확대경을 들고 내 칼이 닿는 곳마다 관찰했어요. 인후부의 분비선을 오랫동안 칼로 도려낼 때도 머리나 손 또는 발 등 어느 곳 하나도 움찔거리질 않았어요. 그 학생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Dr. 로제타 홀입니다.”

Dr. 홀 가족은 그날 어머니가 공식적으로 표창을 받은 그 영예로운 은혜에 감사했고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특히 남편의 이름을 물려받은 손자가 이 식에 참석해서 더 기뻐했다.

1939년 4월 30일, 뉴욕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도 Dr. 홀 부부는 참관하기로 했다. 박람회에는 새로운 발명품들이 여러 가지 전시되어 있어서 매우 볼 만했다. 메리안과 윌리엄은 박람회에서 전시중인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정신이 팔려 그날 저녁에 열린 ‘코리아 클럽(Korea Club)’에도 지각을 했다. ‘코리아 클럽’은 한국에서 일정 기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번 모임은 특히 한국에서 태어났던 2세 내지 3세들의 재회를 위한 만찬회였다. 초창기 한국 선교사 1세로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셔우드의 어머니가 유일했다.

1년간의 안식년 기간 동안 Dr. 홀 가족의 일정표는 친지들과의 재회, 연수, 관광, ‘대행 사업’ 등으로 꽉 차 있었다. 휴가 동안 다시 힘을 얻은 Dr. 홀 가족은 조선에 돌아갈 날을 고대했다. 조선에는 중국과 일본의 마찰로 많은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Dr. 김은 병원과 요양원에 필요한 의료품을 가지고 빨리 돌아오라고 간청했다. 지난해부터 조선에서는 물품들이 부족해서 병원과 요양원의 보급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린드 양의 편지를 받자 Dr. 홀 가족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셔우드의 병원과 요양원의 의료진들에게 일본 정부나 군부의 병원으로 전직하라고 심한 압박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린드양은 셔우드만이 이러한 압력에 대항해 병원의 의료진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34년과 35년, 1936년과 37년의 크리스마스 실을 도안해 주었던 영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케이드 양이 조선을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9월까지 서울에서 만날 수 있으면, 1940년과 41년의 크리스마스 실을 또 도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정이 이렇게 급박했으므로 Dr. 홀 가족은 서둘러 선편을 예약했다. 에스에스 프레지던트 피어스(SS President Pierce) 호는 1939년 8월 11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할 예정이었다. 셔우드의 어머니는 벤트너에 있던 Dr. 홀 가족의 숙소에 와서 마지막 짐 싸는 일을 도와 주었다. 병원에서 쓸 보급품들과 무거운 트렁크들은 먼저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이 짐들은 화물 회사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파나마 운하를 경유하는 선편으로 운송되었다.

떠나기 전 메릴랜드의 스추릿에 살고 있는 에밀리 해스킨즈 루스(Emily Haskins Luce)와 그녀의 남편인 클레이튼 루스(Clayton Luce) 목사의 초청을 받아 그들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다시 서부로 가기 전에 메리안의 언니인 에머 라인위버 가족을 방문했다. 라인위버 목사는 메릴랜드의 에크하트 광산(Ekhart Mine)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7월 8일, Dr. 홀 부부는 어머니와 작별하고 사촌인 에밀리의 집에 도착하자 선교위원회에서 보낸 한 통의 전보가 도착해 있었다. 선교위원회에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Dr. 홀 가족의 여비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Dr. 홀 가족 스스로 여비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여행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병원의 보급품과 무거운 짐들을 이미 샌프란시스코로 보내고 난 다음 이런 일이 생겼으니 Dr. 홀 가족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기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 문제를 사촌인 에밀리에게 말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여러 해를 두고 Dr. 홀 부부의 선교 사업을 그토록 많이 도와 주었는데 이제 와서 또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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