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근세의 교회 (3)

II. 유럽 각국의 종교개혁 (2)

1. 영국의 종교개혁 (2)

3)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스코틀랜드(Scotland)에서는 칼빈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John Knox)에 의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이 당겨지게 되었으며, 1560년에 스코틀랜드 국회가 신교를 국교로 정했고, 1570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영국(England)에서는 1572년에런던의 근교 완트 셔윗이라는 곳에서 노회가 시작되었고, 1643년, 런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교회에서 121명의 목사와 30명의 평신도들이 모여 장로교 헌법을 초안하여 공포하였으며, 칼빈주의의 개혁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장로회 신경) 그리고 소요리 문답(The Shorter Catechism), 대요리 문답(The larger Catechism)과 교회 정치, 예배 모범들을 발표하였다.

4) 침례교회(Baptist Church)

1608년, 네덜란드로 망명한 청교도 존 스미스(John Smith)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미국은 1639년에 윌리엄 로저(William Rodger)와 존 클레익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전신침례를 주장했다. 특히 19세기의 저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도 침례교도였으며,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따르는 칼빈주의자였다.

5) 퀘이커 교회(Quaker Church)

17세기 조지 폭스(George Fox)에 의하여 창설된 퀘이커 교회는 요한복음의 “나는 너를 친구라 하노니”라는 말씀을 특별히 사랑했다. 성령을 사모하였으며 모든 백성의 권위와 가치를 존경했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하였고, 전쟁이나 재난에 있어서 구제 사업을 중요시하였다.

2. 스위스의 종교개혁

1)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루터의 성경으로부터’라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518년, 면죄부를 공격했고, 취리히 교회당에서 성상과 성물들을 철거했으며, 수도원을 폐지하였다. 구교와의 전쟁에서 신교 목사로 종군 중에 전사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상징설(기념설)을 주장하였다. 참고로, 로마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며, 루터파는 공재설을, 칼빈파는 츠빙글리와 루터의 중간인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2) 본격적인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프랑스인 파렐(Farel)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존 칼빈(John Calvin)과 함께 사역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장로교회 헌법이라 불리는 ‘교회 규칙(Church Order)’을 작성하였으며 교회 정치 형태로 장로 정치를 채택하였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추종자들을 얻었고, 그의 영향은 이탈리아와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독일까지 확대되었다. 칼빈은 유일한 국제적 종교 개혁가였다.

3) 재세례파 운동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에 의하여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지상 명령’을 엄격히 지켜서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특히 재세례파는 국가(사회)와 교회의 협력을 거부하는 혁명적인 종파로 가톨릭과 또 다른 개신교의 교파들에 의해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1) 중세에 가톨릭에 대항하여 교회를 개혁하자는 운동은 어디서나 일어났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일어났으며, 루터와 츠빙글리 등은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던 개신교인들은 사도적이며 성경적인 초대교회를 새롭게 만들길 원했다. 특히 재세례파라고 불렸던 이들은 과격한 성경 이해를 통해 분리주의적인 교회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그 당시의 사회를 악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극도로 비사회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으며, 유럽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박해를 겪은 이후에 미국에 이주하여, 메노나이트라 불리면서 군집 생활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분리’라는 독특한 재세례파의 교의에 따라 재세례파는 자신들을‘성도’라고 공언하면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들은 세상과 대립하며 군대를 부정하고, 모든 맹세를 거부했다. 이들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기에 과격파로 분류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탈국가적, 탈사회적인 삶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을 그렇게 부르도록 만들었다.

3. 프랑스의 종교개혁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s)라 부른다. 위그노는 16세기 중반에 강력한 당파를 형성하여 정치 세력이 되었다. 1562년, 시민 전쟁(Civil War)에서 가톨릭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위그노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큰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왕권을 보호하려던 찰스 9세의 섭정인 그의 어머니 카트린(Catherin de Medici)에 의하여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Saint Bartholomew’s Day)에 파리에서만 이천 명 이상, 전국적으로 일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학살되었다.

1594년에 대학살의 주요 목표 인물이었던 헨리 부르몽이 즉위하여 헨리 4세가 되었으며, 위그노에게 개인적인 예배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공적 예배의 권리가 주어지는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s)을 발표하였다.

1610년에 헨리 4세는 암살되었고, 신교도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당하였으며, 다른 나라로 도망하거나 새로운 세계(The New World)를 찾아 떠났다.

4. 독일의 종교개혁

1) 초기의 종교개혁

루터는 로마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였으나 정치적인 문제들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제후 프레데릭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숨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개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25년, 농민 전쟁에서 루터가 귀족들을 옹호하여 평민계급은 종교개혁을 등지게 되었으며, 중간계급과 상류계급에서 개혁의 물결은 계속되었다.

2) 30년 전쟁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평화 협상 후에 비교적 평화를 누렸던 신교도들은 1618년, 이 평화협상이 깨어지며 30년 동안 구교도들과의 야만적인 싸움에 의하여 박해를 당하였다. 30년 전쟁은 1648년, 웨스트 팔리아 평화 조약(The Peace of West Phalia)에 의하여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일종의 소모 전쟁으로 독일의 인구가 1,500만 명에서 50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루터파들이 묵인되었고, 칼빈파도 포함되었다.

5. 가톨릭의 개혁

많은 구교도들은 교황제를 폐지하기보다 정화하기를 원하였으므로 1545~1563년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 등에 의하여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교황청에서는 마테오 리치 등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 편집자 주 : 이학진 장로는 교회 안팎에서 말씀 인도자로 사역하고 있다. 성경 교재인 『성경 통독과 이해를 위한 싹 난 지팡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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