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불편한 심사를 애써 감추고 있었다. 곧 남편의 60번째 생일, 회갑이 다가오고 있었다. 100수를 하는 분들이 나오고 있는 장수세대인 요즈음 회갑은 없는 거라 하지만, 수선스럽지 않게 가족끼리 육십 년을 살아온 삶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어렵거나 별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미역국조차도 끓이지 말라는 엄명을 했다. 매년 가족, 친구들과 함께 생일을 핑계로 간단한 저녁을 같이 해왔다. 격조해질 수 있는 관계에 구실이 있어서 좋다고 말하던 남편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자연스런 일은 정녕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명령이 이상했지만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겠지, 이해하려 해도 심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혹 아이들이 뭔가를 비밀리에 계획하고 있다면 그것까지도 사양한다고 했고, 제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게 단단히 타일러 두라는 부탁까지 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으로 회갑을 보내는 게 자신을 위한 거라는 당부까지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이 아빠의 생신을 한 번도 변변히 챙겨드리지 못했으니 육십이라는 특별한 생일에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고마운 마음에 그녀도 좋은 계획이라고 동조했다. 그런데 그걸 말려달라니. 아이들의 성의까지 무시하는 남편이 이해가 되지 않고 속이 끓었지만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 없었다.

한 번 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갈 줄밖에 모르는 남편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결혼 초기엔 갑자기 맞닥뜨린 그 성품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던 그녀였다. 자신의 뜻을 조금만 굽히면 많은 일들이 편안하게 넘어갈 것 같아서 설득을 해도 도무지 꺾이지 않는 남편의 고집 앞에서 한숨과 함께 “당신의 혈액형은 A형도 B형도 아닌 불도저형이지요?” 라고 말하며 체념해 버렸던 일이 수없이 많았다. 이젠 삼십 년을 같이 하고 보니 어떤 일에 고집을 부릴지를 미리 알 수 있어 그럴 만한 일은 피하는 지혜까지 생겼다. 그렇지만 매년 하던 대로도 아니고 그냥 생일을 지나치자는 완강한 그의 결심이 도무지 납득되질 않았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며칠 동안 남편의 처사를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는 그녀에게 이상한 말까지 했다. 은근한 목소리로 자신의 회갑 선물로 몇천 불을 쓸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이건 또 얼마나 난해한 상황이란 말인가! 이상한 말은 그녀의 불편했던 심사를 염려하는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육십이 되어가니 생각하는 능력조차 떨어져 버렸나?

집안과 사업의 모든 돈 관리는 남편이 하고 있다. 얼마를 쓰든 어디에 쓰든 남편이 판단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믿고 불편 없이 살았는데 몇천 불을 혼자서 쓸 일이 생겼다며 의논까지 해오니 염려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불길한 일부터 떠오르는지라, 그녀는 혹 가족에게 알릴 수 없는 나쁜 일이 생겨 돈과 시간이 필요해서 자신의 생일 기간을 이용해 처리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아닐 거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물어도 엷은 미소만 머금은 입을 다문체로 묵묵부답. 궁금증조차 포기한 그녀는 또 다시 체념을 하기로 노력을 했으나 관찰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삼일, 일주일을 살펴봐도 특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꾸미지 않고 아무 일도 당하지 사람의 자세로 힌트라고는 조금도 얻을 수 없는 자세였다.

남편의 회갑은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혼자의 힘으로는 알아낼 방법을 찾지 못한 그녀는 주말에 아이들이 오면 묘안을 합하여 그 비밀을 캐내자고 작정한 그날. 저녁 식사 후 마주 앉은 남편은 큼직한 봉투 하나를 슬며시 밀어 주고는 겸연쩍은 듯 뒤뜰로 나가버리더라고 했다.  아내가 열어 본 봉투 속에는 비행기표와 현금, 또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보로 시작된 긴 편지의 내용은 힘들고 어려운 이민 생활에 가정과 자신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내를 향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설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아내임을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정 가족에게 귀하고 고마운 아내를 맞게 해준 것 감사하다고 가서 대신 전하며 친정 식구들과 기쁘게 보내고 오라고 친정행 비행기표를 구했고, 표를 구하고 남은 돈을 동봉한 이유는 친정 가는 이바지를 구입하는 데 한 푼도 남김없이 다 쓰라는 뜻이라고 했다. 고작 몇천 불로 삼십여 년 진 빚을 대신할 수 없지만, 아내의 기쁨이 자신에게 진정한 선물이기에 비록 이 선물이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이긴 하지만 용서해 주는 의미로 받아 달라는 가슴 울리는 사연이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동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도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에 빠져들어가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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