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 문학 강의

 

이어령 지음 / 포이에마 펴냄

‘소설은 시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음악처럼 신비한 힘도, 드라마처럼 숨 막히는 스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팩트나 수학처럼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공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거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삶의 민낯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이라고 하면 누구나 신비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 앞에 나타나는 영성의 체험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성당 안, 혹은 미술관의 전시실이 아니라 지극히 산문적인 소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옛날 성자들의 꽃밭이 아니라 사막에서 영성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오늘의 사막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소설의 무대인 도시의 아스팔트 거리일 것입니다.

소설에 왜 ‘작은 것’을 뜻하는 ‘소’자가 들어갔는지 알 만합니다. 모두가 소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고, 전설의 주인공은 영웅이고 장사들입니다. 중세 로망의 주인공 역시 왕이고 기사들입니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주인공들은 바로 담 너머에 살고 있는 이웃 사람들, 그도 아니라면 술주정꾼, 간질환자, 장애인 그리고 홈리스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태초에 있었다는 로고스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인간에게 전달이 안 됩니다. 종교를 뜻하는 religion이 무엇입니까? 달리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시re’ ‘잇다 ligare’, 끊긴 것을 이어 준다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끊긴 것을 이어 주는 사람이 예수님인데, 하늘의 말과 인간들의 말을 이어 주려고 할 때 생겨나는 것이 비유, 이야기, 메타포, 시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소설의 허구성입니다.‘(프롤로그, 우리는 왜 소설에서 영성을 찾으려 하는가? 중에서)

저자는 다섯 편의 소설을 감상하면서, 그를 통해 영성의 세계, 신앙의 세계, 신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영성의 세계가 아니라 문학평론가로서 다섯 편의 소설을 분석하여 소설을 통해서도 영성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 그리고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소개한다. ‘엄밀한 기획이나 체계 없이 나누는 이야기들이지만 노 비평가의 박식함과 달변의 수사, 그리고 통찰이 비어져 나온다. 판에 박힌 종교적 해석이 아닌, 인문학자의 눈을 통해 숨어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도 이 강의에 함께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는 출판사의 설명대로, 양화진문화원에서의 문학 강연 내용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본문 일부)

'시몬 베이유도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끝없이 추락의 꿈을 꿉니다. 거기 심연이 있어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마음 속에서 추락하는 존재입니다. 타락한 천사처럼 말이지요. 추락하니까 거기 심연이 있는 것이지요. 죄의 심연일 수도 있고, 절망의 심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져 보지 않고는 상승하지 못합니다. 지렛대는 한쪽이 아래로 내려가야 다른 쪽이 올라가잖아요. 거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은 곳,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중력에 따라 끝없이 하강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 끝없이 자기 해체를 겪은 사람만이 상승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추락하는 힘 외에 또 하나의 힘,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시몬 베이유는 이 두 가지 힘을 ‘중력’과 ‘은총’으로 표현했습니다. 잡아당기는 중력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은총의 힘이 있어 우리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 모두 신 아래에서는 같은 생명입니다. 생명애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겉으로는 잡아먹고 잡아먹히지만, 깊은 세계로 들어가면 신의 구제를 바라는 존재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신에 다다르는 사랑에 닿아 있는 것이에요. 심지어 싸우기도 서로 경계하기도 하지만, 고맙다, 사랑한다, 너 때문에 살았다고 말해요. 두려움이 완전한 사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파이와 같은 극한의 대결,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언어, 동물의 포효로는 절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피타고라스가 절망한 것처럼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 그게 생명이고 우주입니다. 신의 세계란 그런 것이지요. 3.141592... 그 영원히 풀리지 않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라이프 오브 파이’입니다. 그렇다고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에요. 과학은 우리를 적어도 근사치에까지는 데려갑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1퍼센트, 그것을 뚫고 갈 수 있느냐는 극한 상황에 닥쳐봐야 합니다.'

'그것을 신학은 자꾸 로고스로 설명하려 합니다. 초월까지도 영성까지도 합리적으로 나타내려고 해요. 이런 것은 소설이나 시, 예술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감성과 이성과 영성을 통합할 수 있는 인간이 가진 유일한 수단은 바로 예술 언어라는 것이지요.'

'파이 이야기는 이주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남방에서 북방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처지가 꼭 이렇습니다. 우리 역시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타고서 그러한 이주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대양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요? 벵골 호랑이와 나를 관통해 흐르는 생명, 생명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를 서로 자극을 주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호랑이 혼자 보트에 탔으면 죽었을 거예요. 소년 혼자 탔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호랑이와 함께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역설, 생명이란 이렇게 역설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라이프보트를 타고서 새로운 라이프를 찾아가는 도상에 있습니다. 21세기, 현대 문명의 영성 순례가 꼭 파이의 모습과 같습니다.'

'생명이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리차드 파커를 생각해 보세요. 환경이 달라지면, 그러니까 227일간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극한 상황이 지나가면 언제 보았냐는 듯 흩어지거든요. 그래서 끝없는 생명의 목마름과 고통, 채워지지 않는 생명의 갈증이 신앙이 되고 우리의 현실이 되었을 때 사랑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위선적인 사랑을 하지 마십시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내용을 다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다만 자기를 잡아먹는 호랑이가 물에 빠졌을 때 가만두면 자기는 해방되긴 하지만, 호랑이의 죽음이 곧 자기의 죽음이라는 걸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생명 관계, 부부 관계이고 이것이 원수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합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사랑이 싹터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죽더라도 너 살리겠다고 뛰어들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 사랑인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이 가장 많이 잊어버린 게 ‘생명’이란 말, ‘사랑’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숲에 있을 때는 숲을 못 보듯이,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면 생명 밖으로 나가야 해요. 숲을 알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해요. 행복을 알려면 불행해져야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생명을 알려고 생명 바깥으로 나가면 죽어요. 인간은 결코 살아서 생명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신 거예요.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너희들이 생명 밖으로 나오면 죽지만, 나를 보면 생명이 뭔지를 알 수 있어. 내가 한 행적을 보면 생명이 원지 알아. 살기 위해서 죽는 그 의미를 알게 돼. 씨앗도 그렇잖아. 씨앗이 죽어야 싹이 나잖아. 나는 죽을 거야. 이게 사랑이고 이게 영생이야.’ 그런 사랑, 그런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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