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우리들 마음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년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그 어느 것보다 뚜렷합니다. 여자 아이들은 자라서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하며, 남자 아이들은 커서 아버지처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년기에 들어서면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오직 돈을 벌어오는 기계, 무기력하고 잔소리만 하는 존재로 자리를 잡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아내에서 어머니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는데 비해 남자는그냥 남자로 머물러 있으며 명칭만 바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여자는 어머니로서의 자기 역할을 지키다 보니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런 행위가 그들도 모르게 아버지의 존재를 낮추어 보게 되는 원인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존재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차라리 아버지가 자기 주위에 없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장년기에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속한 조직(교회, 직장, 사회 집단 등) 에서 “역발산 기개세”의 형세로 “천방지축” 의 영역을 넓히고, “욱일승천” 하므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미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중.노년기의 황혼에 들어서면 서서히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리워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세상풍파를 겪다 보니 아버지가 큰 울타리였음을 깨닫고, 다시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아버지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생을 마감한다고 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7살에서 10살 정도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34년 전, 아버지는 나에게 손바닥 크기 만한 책을 한 권 주셨습니다. 이것은 흔히 보는 호화 장정의 책이 아니라 당신께서 쓰시고 또 직접 복사하여 앞과 뒤의 표지를 두꺼운 마분지로 덮어서 꾸민 책이었습니다. 제목이 앞 표지 왼쪽 구석에 씌어 있었습니다. ‘기도성서’. 내용은 놀랍게도 ‘신약전서’를 절에 따라 제목을 붙이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신 것이 겨우 2~3년 전인데 얼마나 성경을 그 사이에 많이 읽으셨길래 당신 나름대로 성경을 제목으로 분류하셨을까? 제게는 아버지에 대한 외경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신 책을 받아서 가방 속에 깊숙이 집어 넣고는 다시는 기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주 아버지에 대한 상념에 젖어 들곤 합니다. 나도 벌써….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기도 하고, 터질 것 같은 후회가 엄습해 옵니다. 조금 더 잘 해드릴 수 있었는데….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때늦은 후회 속에 아버지를 불러 봅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일찍 성경을 완독했습니다. 신약전서를 연말까지 다시 한 번 완독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아버지께서 주신 “기도성서”가 떠올랐습니다. 부랴부랴 가방에서 찾아 내가 갖고 다니는 성경 뒷 표지 안쪽에 캥거루 주머니를 만들어 그곳에 넣으니 안성맞춤입니다. 아침마다 일 나가기 전에 ‘기도성서’를 펴놓고 성경을 보니 새로운 맛이 납니다. 아버지의 성경 구절, 구절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과 이해 그리고 아버지의 숨결을 매일 느끼니 이 얼마나 복을 받은 것인가 생각하며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큰 분이셨습니다.

나도 나의 자녀들에게 ‘구약전서’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것처럼 “기도성서”로 만들어 아버지의 것과 같이 전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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