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소리

Dr. 홀의 가족은 예정대로 1939년 3월 11일, 미국을 떠났다. Dr. 홀의 가족이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한국에는 1939년이란 해가 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해는 없었다. 한국의 달력은 그 사이에 일본 달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본 달력이란 일본의 첫 황제인 메이지로 시작하는 연호를 말한다. 모든 공문서에는 서양 달력의 1939년이 기원 2599년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 일본식 연호를 쓰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에게는 서양 달력을 쓸 수 있게 허가하고 있었으나, 조선 사람들이 서양 달력을 이용하면 일본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비애국자로 간주되어 경고를 받았다. 일본 군부는 한국 내 서양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그 견해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Dr. 홀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Dr. 홀의 가족이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39년 9월 12일, Dr. 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띄웠다.

...고베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날씨가 굉장히 무더웠습니다. 서울에서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지독한 무더위였습니다.

조(Joe)가 3일 동안이나 열이 나면서 앓아 몹시 걱정했습니다. 저희도 모두 더위를 먹어 꼼짝 못할 정도였습니다. 저희가 서울에 도착하자 노튼 병원(해주 구세 병원)의 Dr. 김, 요양원의 Dr. 리, 남학교(해주 의창학교)의 수석 교사가 서울까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메리안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아펜젤러 씨 댁에서, 저와 윌리엄은 젠슨 씨 댁에서 묵었습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외국인들은 택시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있습니다. 특히 반영 운동이 전개됐는데 저희가 도착하기 직전에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일본이 독일을 공산당과 한통속이 됐다고 비난한 후에 대영 감정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택시 승차 거부 외에는 외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은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일본인이나 조선 사람들 모두 저희들에게 친절합니다.

식량 부족 때문에 처음으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메리안은 여러 상점들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500g의 설탕을 구했습니다. 통조림류도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값은 하늘같이 치솟아 있습니다. 그러나 쌀과 감자는 아직 많습니다. 분말 우유는 구할 수 없지만 요양원에는 젖소가 있으니 우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미리 식량을 준비해 둔 선교사 친구들이 나누어 주겠다고 하니 굶을 염려는 없습니다. 연료도 큰 문제이지만 저희에게는 석탄이 좀 남아 있고 나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 상황과 생활 환경은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구하려 하고 요양원 직원들도 더욱 협조적입니다. 저희가 가장 크게 봉사할 수 있고, 또 저희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마침 요양원의 X-Ray 필름이 거의 떨어져가는 때에 저희가 필름을 가져오게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화폐의 해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어 X-Ray 필름, 거즈, 기타 약품들을 주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내온 선물이면 저희가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품을 만든 회사에 직접 보내는 게 아니라 개인이 따로 포장하여 ‘선교 병원용 구제 물자-비상업용임’이라고 겉에 표시하면 됩니다.

해주에 도착한 후 해외 여선교회의 런드 양과 달비(Dalbey) 양의 숙사에 초대받아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달비 양은 바로우 양 대신 새로 부임해온 분입니다. 나이는 런드 양과 비슷한데 좋은 분 같습니다. 그들이 필리스의 생일 파티를 차려 주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학교, 병원, 요양원을 둘러보니 제가 안식년 휴가를 떠났을 때보다 더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학생, 환자, 직원수도 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모두들 저희가 다시 돌아와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원했던 큰 선물을 가져가지 못해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남학교에 절실히 필요한 교내 예배당을 지을 자금을 모금해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도착하자 요양원, 병원, 학교에서는 환영회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물론 런드 양과 달비 양도 초청받았습니다. 학교 이사회에서도 환영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요양원에서는 우리를 환영하는 초록색의 큰 아치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집안에는 수리해야 할 곳도 많고 물건들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어머니의 물건 중에선 난로의 꼭지 부분만 없어졌습니다. 지붕은 비가 샙니다. 수리할 곳도 많은데 비용이 어디에서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물 석탄 난로를 하나 사왔는데 서울에 와보니 운송비를 합한 값이면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서울의 많은 외국인들이 자꾸 이 나라를 떠나고 있어 그들이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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