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지음 /꽃 자리 펴냄

 

시간과 영원, 내재와 초월, 성과 속 사이의 긴장을 의식하면서도, 통합할 수 있는 개념을 포월(匍越), 기어서 넘기에서 찾았다고 김기석 목사는 산문집의 여는 글에서 말한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을 말할 수는 없었다. 또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다. 칼 야스퍼스는 철학의 과제를 ‘포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암호는 물론 세상과 인간이 빚어내는 삶의 풍경일 것이다.”

“설교단에서 주일마다 선포되는 말씀이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또한 성도의 작은 일상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면 슬픈 일”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목회자들이나 신자들 대부분이 사용하는 상투적인 종교의 언어들을 이 산문집에서 되풀이하지 않는다. “‘구원, 사랑, 화해, 용서, 자유, 섬김, 돌봄, 희생’이라는 종교적인 언어들이 상투어로 변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면서 “예수의 말에 권위가 있는 것은 말과 존재의 틈 없는 일치”에서 비롯되므로 “상투어로 변해버린 종교적 언어를 우리의 일상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이 오늘 목회자의 과제”라고 말한다.

이 산문집은 종교 서적보다는 문학 서적으로 읽힌다. 고요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재배치하여 무심히 흘러가는 삶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변화시킨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산문은 다분히 시적인 수필로 읽힌다.

기어서 넘기, 하면 지렁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지렁이는 없고 그가 남긴 흔적을 자주 보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렁이를 질투한다고 말한다.“지렁이는 나뭇잎, 풀, 쓰레기 등 버려진 유기물을 제 몸무게 만큼 먹어치우는 생태계의 청소부다. 해로운 미생물을 제거하고 기름진 분변토를 내놓아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흙 속에 길을 내서 토양에 공기와 수분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지렁이를 닮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내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한 후 그것을 세상의 선물로 내놓을 수 있을까.”

글은 소통하는 것이고, 소통을 위해서는 경계선을 넘어야 하고 경계선을 넘으려면 의식이 개화해야 한다는 저자는 ‘경계선을 가로지르기 위해 애써온 의식의 흔적’인 자신의 산문집을 지렁이가 남긴 흔적에 비유한다.

저자의 글에선 시가 많이 인용된다. 마주치는 사람, 누군가가 들려준 이야기들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책 제목 『아슬아슬한 희망』도 한 후배의 이야기 중에서 저자의 가슴에 남은 말이다. 신자 몇 명 없는 교회에 부임하여 암담해진 후배는 예배당 뒤편 흙 둔덕에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 준다. “그 어린 소나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대나무 한 대를 잘라다가 소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고는 흙으로 뿌리를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리고 그 소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슬아슬한 희망.’그는 소나무가 자라 그늘을 드리우는 날을 내다보며 날마다 물을 주었다. 어느 결에 그의 가슴의 어둠이 물러갔다.”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과제라고 하면서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주목한다. 깊이 각성된 한 사람이 겹질기게 추구하는 새로운 혁명의 삶에 희망을 건다.

손석춘 건대 교수는 저자가 ‘한국어로 가장 아름다운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회자된다며, 인생을 깊이 천착하는 혜안이 눈부시다고 일독을 권했다.

*본문 중에서*

(...) 일전의 어느 통계에서 개신교 하면 연상되는 단어를 묻는 질문에 ‘배타성’, ‘헌금 강요’, ‘독선’, ‘세습’이라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성추행이라는 단어까지 추가될 판이다. 개신교회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듯 언론이 개신교회에 대해 유난히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문제의 뿌리는 살피지 않고 곁가지만 흔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돈과 목회 방법론과 리더십 이론을 믿었던 것은 아닌가?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국 신학자인 미로슬라프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원래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기능 장애’라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가‘상승’과‘회귀’의 선순환 속에 있을 때 건강하다고 말한다. 상승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면, 회귀는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과정일 것이다. 상승이라는 측면이 기능장애를 일으키면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는 신앙의 기능 축소이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앙과 관계 없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확장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는 우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리고 자기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밀로슬라프 볼프는 그 예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내가 너를 승리하게 하리라’는 말로 대치하는 것과, 십자가의 적대감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사랑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상징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지적한다.

회귀라는 측면이 기능 장애를 일으킬 때도 역시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는 신앙의 나태함이다. 적당히 체제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진정제’와 ‘신경안정제’ 혹은 ‘환각제’와 ‘흥분제’로 기능한다. 이 경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보다는 자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 한다. 둘째는 신앙의 강요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강제함으로써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선교 신학자는 선교란 ‘매력의 감염’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 매력적이면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 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다가가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다가갈 수 있는 곳에 땅 끝이 있다.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땅 끝이다.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인 아감벨은 사회에서 쉽게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일러 ‘호모 사케르’라 했다. 문자적 의미는 ‘거룩한 인간’이지만 실제로 ‘잉여 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잉여 인간이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가길 꺼린다. 그 만남이 야기할지도 모를 불편함과 감성적인 얽힘이 싫기 때문이다.

(...) 열정적인 일단의 전도자들이 어느 도시의 옷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마침 그들 앞으로 헙수룩한 차림의 농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메노나이트 교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전도자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불문곡직하고 물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댕돌같던 농부도 당황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질문 앞에 서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던 그는 전도자에게 펜과 종이를 빌려 십여 명의 주소를 적어 내려갔다. 대개는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이었지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도 섞여 있었다. 이윽고 농부는 전도자에게 말했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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