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소리 (2)

전쟁의 바람은 서서히 해주까지 불어왔다. 일본 육군은 Dr. 셔우드의 무선 라디오를 빼앗아갔다. 이때부터 셔우드는 국제 뉴스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장파 라디오를 들으면 선전만 나올 뿐이었다. 유럽에서 승리한 히틀러, 일본의 빛나는 만주 정복, 미국과 영국의 중국 정부 후원으로 인한 일본의 분노, 이에 대응하는 각처의 외국인 세력에 대한 도전 같은 내용들이었다. “극동에 새 질서를 정립하려는 일본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주장이었다.

장파 라디오 선전에 나오는 ‘일본의 승리’는 수많은 인명 손실을 지불한 대가임을 알 수 있었다. 해주에 있는 일본인 가족들 중에도 전사자가 없는 집은 거의 없었다. 아들을 모두 잃은 집도 있었다. 학생들과 유지들에게도 전몰장병을 위한 의식을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셔우드는 남학교 교장이었으므로 전사자가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돌아올 때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역에 마중을 나가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전사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작고 하얀 상자에 담긴 채 돌아왔다. 날이 갈수록 하얀 상자의 수는 많아졌고 이 슬픈 마중도 더욱 빈번해졌다.

또한 신병들이 전선으로 떠날 때에도 학생들은 역에 모여 그들을 환송해야 했다. 전쟁 초기였던 그 시절에는 조선인 신병들은 거의 없었다. 그 후에 일본인들이 신용할 만하다고 해서 뽑은 조선인 신병들이 조금 있었다. 전쟁이 더 진행되자 아직 나이 어린 학생과 나이 든 사람들까지 징집되었다.

공립 병원에서는 일본 부상병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 병동을 짓느라 부산스러웠다. 셔우드의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도 부상병 치료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이 일로 남은 의료진들의 업무가 가중되어 셔우드의 청진기도 정신없이 바빠졌다.

해주 같은 작은 곳까지 부상병들이 속속 증가되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Dr. 셔우드는 라디오와 신문에서 들은 ‘빛나는 전투의 승리’들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편물들은 샅샅이 검열되었고 셔우드의 병원으로 오는 편지들은 모두 압수되었다. 친지들에 대한 소식은 물론, 셔우드 가족에게 닥쳐오고 있는 일들까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셔우드의 가족들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청진기는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가슴 속의 아주 미세한 소리까지도 들려 준다. 그렇다면 셔우드의 청진기는 셔우드가 가진 장파 라디오에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청취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상해에서 보내는 미국 방송을 들을 수는 없을까? 셔우드의 생각은 여기에까지 미쳤다. 그 방송은 선전이 아니고 정확한 뉴스를 보낸다는 정평이 나있었다.

어느 날 밤, 셔우드는 우선 집 주위를 돌아보고 수상한 자가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 등화관제용 검은 장막을 내리고 유리창을 가렸다. 불을 끄기 전에 문들을 다 잠그고 실험에 들어갔다. 차근차근히 다이얼을 돌리며 주의해 들었지만 현지 방송만 크게 들릴 뿐 상해 방송은 청취되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속삭이는 듯한 여린 목소리, 귀에 익은 아나운서 캐롤 알고트의 목소리가 상해로부터 들려 왔다. 그 방송의 뉴스들은 일본 방송과는 전혀 달랐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는 소식을 알 수 없었지만 일본은 아직도 중국을 다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부 세계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자 셔우드의 가족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셔우드는 상해의 라디오 방송 청취에 대해서 메리안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일본 헌병들이 셔우드를 찾아와서 중국과 유럽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탐문하곤 했다. 셔우드는 그들의 수법에 속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모의가 있다는데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는 등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그들이 질문할 때마다 셔우드는 “당신들은 내 편지를 그토록 철저히 검열하면서 그런 모의에 대한 정보를 왜 내게 묻느냐?”고 반박했다.

한번은 Dr. 김이 헌병대에 불려갔다. 그들은 셔우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내놓고는, 셔우드의 글씨를 알아 보지 못하겠다면서 Dr. 김에게 읽으라고 명령했다. 수상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헌병들은 Dr. 김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셔우드가 전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는지, 또는 일본군의 이동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수소문한 일은 없었는지 등을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Dr. 김은 한 마디로 대꾸했다. “아니오, 그런 적은 없소. 그러나 환자들에게 쓸 약품들을 구할 수 없다며 심한 불평을 합디다.”

이에 대해 그들은 선처하겠다고 말로만 약속했다.

일반 상품들까지도 완전히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설탕은 서울의 특수한 상점에서만 구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약 $20어치의 다른 물건들을 구입할 경우만 최고 500g의 설탕을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손님들이 와서 차를 준비했다. 그들은 테이블 위의 설탕 그릇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순식간에 설탕 그릇을 비워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메리안도 다른 선교사 부인들처럼 미리 설탕을 타서 내놓게 되었다.

셔우드는 청진기로 계속 상해에서 방송되는 뉴스를 청취했다. 유럽은 이미 위험 수위에 육박해 있었다. 방송 해설자는 극동에서 벌어진 잔악한 살상에 대해 말했다. 양군은 서로 상대방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공격했다. 어떤 사건은 그 끔찍한 전말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셔우드는 이런 내용을 전부 아내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의 무대가 아직은 ‘고요한 아침의 땅’인 조선과 멀리 있음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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