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이 심방을 오시면 찬송을 부를 때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있으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좋아하는 찬송을 부를 때 찬송가 책을 펼치지 않고 부르는가 하면 혹자는 찬송가 책을 보면서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음정과 박자를 잘 맞추지를 못합니다. 혼자서 부르는 찬송가도 없었습니다. 남들이 찬송가를 부를 때 따라 불러서 내 소리를 남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에 섞어 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찬송가 듣는 것은 좋아합니다.

젊어서도 모임에 참석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으로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찬송가 한 곡을 완전히 외어서 좋아하는 찬송곡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곡조와 박자를 따라하기 쉬운 것으로 골랐습니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누워 있을 때에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완전히 외우기까지 한 달은 걸린 듯합니다. 이제 틈만 나면 그 찬송가를 부릅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찬송가 제목은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입니다.

예배중에 찬송가를 따라 부를 때에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스스로 가사를 외우고 불러보니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찬송가 외우기에 도전하였습니다. 그 찬송가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입니다. 이제 찬송가를 두 개나 책 없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군요. 세 곡입니다. 두 곡에 있는 후렴들을 따로 붙여 부르면 세 곡이 됩니다. 계속 도전할 계획입니다. 치매를 예방하는 뜻도 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찬송가를 또 외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입니다. 애들 말로 기분이 째지게 좋습니다.

최근에 한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서 트로트곡에 맞추어 찬송가를 불렀는데 지금은 세상의 연예기획사에서 그분에게 트로트 음반 출시에 대한 계획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노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세상에서 러브콜을 했을까요? 그 목사님의 찬송가에 대한 대단한 발상 전환이었습니다. 70년전, 아니 50년 전만 해도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찬송가 책에는 음표가 없고 단순히 가사만 기록되어 있었으며, 각자의 입맛에 맞게 찬송가를 마음대로 흥얼댔습니다. 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러나 나는 전통적인 방식을 택하여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힘들어도 찬송가를 외워서 부를 것입니다.

나는 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도 좋아합니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이 노래를 그들의 모임 말미에 꼭 부릅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나중에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된 존 뉴턴이 지었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작사자는 노예선의 선장이었다가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찬송가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만, 아직 가사를 암기하지 못했습니다.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존 뉴턴 목사가 실어 나른 그 수많은 흑인 노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불쌍한 흑인 노예들도 과연 회심을 하고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들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놔 두었으면 자기들의 고향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라도 즐겼을 텐데…

그들을 구렁텅이에 빠트린 사람이 회심하여 지은 시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데… 무기력하게 끌려와 노예로 일생을 마친, 이름도 없던 그들은 구천에서 울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면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낙원으로 이끌어 가셨을까... 괜히 안타깝습니다.

구약 율법에는 사람을 유인하고 납치하여 팔아먹는 자(인신매매범)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존 뉴턴 선장도 죽임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구속의 원리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존 뉴턴 선장은 구원을 받았고, 끌려와서 노예로 전락한 불쌍한 그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오히려 그들을 구원키 위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그곳에서 옮겨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다 구원받지는 못했을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만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의구심은 사라졌습니다.

우연히 기독교의 어떤 문답 사이트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현문과 현답 하나를 읽었습니다. 질문자는 사정상 현재 다니는 교회를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했는데 그 내용인즉슨, 헌금 (이것이 십일조인지, 감사헌금인지 헌금 종류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을 드려야 하는데, 이 헌금을 현재 출석하는 교회에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헌금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헌금 전액을 쥐고 있거나 교회내에서 소비하기 때문에, 자기의 헌금을 소위 감자탕 교회(서울 광염 교회)처럼 헌금의 대부분을 교회 밖에서 필요한 곳에 사용하는 교회에 드렸으면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무엇인지 짐작하셨을 줄 압니다. 출석교회에서의 헌금 사용 방식이 그럴지라도 출석 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질문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 같습니다. 헌금에 대한 목회자의 기도는 늘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업에 이 헌금들이 긴요하게 쓰여지게 하옵소서.”입니다. 교회를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밖으로 무엇이 흘러갑니까? 에스겔서를 보면 성전으로부터 밖으로 생수가 흘러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수가 흘러가듯 헌금도 밖으로 자연적으로 흘러나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업에 바르게 쓰이길 바라고 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 경배드리고 있으니,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른다는 이치야 말로 불변일 것입니다.

최근에 우연치 않게 <찬양 리더>(최혁 목사 지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음악에 무지하여 띄엄띄엄 읽다가 결국 중간에 읽기를 중단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음악적인 뜻을 몰라서 계속 읽지를 못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몇 가지는 이해할 수 있어서 여기에 옮겨 봅니다.

찬송에는 형식상으로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공연 찬송(전문 찬송)으로 주로 천주교에서 미사시에 전문가가 단독으로 부르는 찬송이고, 두번째는 개신교에서 예배시에 전 참석교인이 부르는 회중 찬송이라고 합니다.

음에는 4가지 물리학적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즉 음 높이, 강약, 장단, 음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은 인간의 감정에 따라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육신과 정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합다. (1) 음이 높으면 대개 영이 밝아진다고 합니다. (2) 음이 낮으면 대부분의 경우, 영은 무거워지고, 침울해지며, 어디엔가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3) 음이 빨라지면 영은 흥분되고 동적이 된다고 합니다. (4) 음이 느려지면 영은 차분해지고 정적이 된다고 합니다.

또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의 찬양 경배의 4가지 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전 중심”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리기 위한 것으로 온전히 찬양은 하나님께만 올려드린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도 중심”으로서 찬양 경배를 새 신자 전도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그 예로 미국에는 구도자 예배, 한국에는 열린 예배가 있다고 합니다. 셋째로는 “은사 중심”으로 자신의 체험이 우선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임재 중심”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교제에 초점을 맞추는 예배로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에 더 초점이 두고 있다고 합니다.

또 찬양에도 방법이 있는데 시편에 소개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리로 드리는 찬양”이 있다고 합니다. (1) 노래로 드리는 찬양(시 104:33), (2) 말로 드리는 찬양(시 145: 21), (3) 외침으로 드리는 찬양(시 32:11) 입니다.

두 번째는 “손으로 드리는 찬양”이라고 합니다. (1) 손을 들고 찬양(시 143:6), (2) 악기로 찬양(시 150:3-5), (3) 손뼉치며 찬양(시 47:1)입니다.

세 번째는 “몸으로 드리는 찬양”으로 분류했습니다. (1) 서서 찬양(시 135:1-2), (2) 무릎 꿇고 찬양(시 95:6), (3)  춤추며 찬양(시 149:3)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으로 드리는 찬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높은 찬양(시 66: 17), (2) 묵상 찬양(시 103:33-34)이 있다고 합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