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가장 큰 특권은 길 잃을 권리

김기석 지음 / 포이에마 펴냄

 
떠도는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착민으로 살아왔다.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젊은 날의 불온함은 어느덧 사라졌고 온순하게 길들여진 짐승이 되고 말았다. (...) 목사로 살아온 지 이미 30년이 넘었다. 하지만 내게는 바위 같은 든든함도 산과 같은 우람함도 심연 같은 깊이도 없다. 이런 자각이 나를 초조하게 했다. 게다가 내 몸의 일부인 한국 교회는 지금 서까래가 무너지고 기둥이 기운 것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지 않은가. 뭔가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는 초조함이 나를 부추겼다. 낯선 곳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었고, 낯선 이들과 만나 존재의 충격을 느끼고 싶었고, 홀로 있음이 주는 호젓함을 누리고 싶었다. 길 위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스치듯 만난 이들이지만 그들은 무뎌진 나의 영혼을 벼리는 좋은 숫돌이 되어 주었다.(여는 글 일부)

저자는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프랑스 등을 다니며 수도원과 교회, 미술관 속에서 하나님과 세상과 공동체를 만났다. 물결처럼 사무치는 ‘고독’과 그분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침묵’,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며 건네는 ‘기도’를 벗 삼아 걸었던 순례의 날들을 잔잔하게 써내려갔다.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지, 어떤 삶의 풍경과 마주할 것인지, 또 영원의 중심이신 분의 마음은 어떠한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40여 일간의 순례 일기이다. 각각의 글을 쓴 날짜와 사진이 함께 담겨 있다.

예술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땅과 일상 속에서 빛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날아오르려 한다. 예수도 그러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폭압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들 곁에 다가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했다. 그 나라는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아픔이 있는 자리,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땅, 바로 이곳이 하늘이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사다리가 없다고 낙심할 것 없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낮은 곳으로 흐르다 보면 하늘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이다.(나가는 글 일부)

평화란 그 마음이 빚어내는 삶의 열매요, 불화란 그 마음을 잃어버린 결과일 뿐이다. 이웃을 기쁘게 한다고 하여 우리 속에 기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기쁨이 우리 속에 유입된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의 단면은 정의여야 한다. 오늘 내게 주어진 소명은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본문 일부)

저자 김기석은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시, 문학, 동서고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진지한 글쓰기와 빼어난 문장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층들을 열어 보이되 화려한 문학적 수사에 머물지 않고 질펀한 삶의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래서 그의 글과 설교에는 ‘한 시대의 온도계’라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세계의 표면이 아닌 이면, 그 너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번득인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파교회 전도사, 이화여고 교목, 청파교회 부목사를 거쳐 1997년부터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예수 새로 보기』, 『예수의 비유 새롭게 듣기』, 『자비를 구하는 외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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