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된 영혼들

버려진 영아들의 생명을 살리고 장애아들을 돌보는 이종락 목사(한국 주사랑공동체 대표)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드랍박스(The Drop Box)’가 미주 전역에 개봉돼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소재를 곱씹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냉혹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 시대는 어떤 이유로든 소중한 친자식을 버리는 부모들, 쉽게 생명의 소중함을 저버리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영혼의 소중함을 잊어 버린 것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와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교회 성장과 건축, 헌금 등 외형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내면적 가치와 영혼의 소중함을 도외시해 왔다. 대부분의 교회가 출석 교인수와 헌금 액수의 성장에 목을 매고, 예배당을 비롯한 건물 증축에 매진해 왔다.

그 이면에는 세속사회의 가치가 기독교의 가치를 대체하는 비극이 존재하고 있다. 이 비극의 희생양은 약하고, 병들고, 힘든 사람들, 신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하고 사랑과 돌봄과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신앙 공동체의 걸림돌이자 짐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뭔가 부족하고 연약함이나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존중받고 용납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상처와 약점을 숨기고 포장하기에 바쁘다. 혹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버려두고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주님의 눈에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신앙의 본질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한 배교자들의 집단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적어도 우리의 모습이 성서가 말하는 교회와 신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이 원인인가?

참된 기독교의 가치는 십자가, 낮아짐, 희생, 섬김, 조건 없는 사랑 등이다. 모두가 외면하는 약하고, 병들고, 상처 입은 약자들을 포용하는 것이 건강한 교회됨의 증거이다. 교회는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임을 입증함으로써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중한 기독교적 가치를 현대 교회는 상실했고, 세속적 가치가 교회를 이끌어가는 동인이 되고 있다. 현대 교회를 끌고 가는 세속적 가치의 정체를 밝혀 보자.

현대 교회를 움직이는 첫번째 동인은 성장지상주의다.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 사회는 경제 성장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성장이 저조하거나 멈출 때, 자본주의 사회는 디플레이션, 공황 등 심각한 생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성장이 곧 생존’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 오래다. ‘먹고 살려면 성장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현대 교회는 이 명제를 허물고 기독교적 가치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오히려 성장지상주의에 정복당해 성장지상주의를 홍보하는 시녀로 전락했다.

물질만능주의는 현대 교회를 움직이는 두번째 동인이다. 성장에 올인하는 사회에 경제적 풍요가 찾아오듯이, 성장지상주의에 물든 교회는 기독교적 가치를 물질 혹은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한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좋은 신앙의 척도이지만,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의 기준이 되었다. 현대 교회는 이웃 사랑조차 물질이나 돈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사랑, 긍휼, 공감, 아끼고 품는 것, 영혼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 영혼의 성숙 등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물질만능주의는 필연적으로 외형주의로 귀착된다. 외형주의는 모든 기독교적 가치를 외형적인 것으로 대체한다. 교회 성장의 척도는 출석 교인수와 예배당과 각종 시설과 시스템과 프로그램이며, 신앙의 척도는 새벽 기도, 헌금, 교회 봉사, 제직(장로, 집사 등) 등이다. 좋은 교회는 많은 교인들이 출석하고 훌륭한 예배당과 부속 시설이 있고, 각종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있는 교회이다. 좋은 신앙인은 장로, 집사직을 가지고 교회 봉사와 기도와 선교에 충성하고, 많은 헌금을 하는 교인이다. 여기에 낮아짐, 사랑, 겸손, 약자에 대한 섬김 등의 가치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외형주의의 또 다른 이름은 율법주의이다. 2천 년 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를 정죄한 이유는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내면적 가치를 외면적 척도와 행위로 대체하면서, 사실상 율법의 정신을 부인한다. 율법주의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정죄하고 죽인다. 종교개혁은 율법주의에 매몰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었지만, 오늘날 개신교회는 그 정신을 상실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진 초대교회는 기독교적 가치에 생명을 건 교회, 영혼의 소중함을 온전히 이해한 교회였다. 초대교회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생명조차 버린 성도들로 넘쳐났다. 어떻게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 시대에 재현할 수 있을까?

관건은 현대교회를 움직이는 세속적 가치의 타파에 있다. 즉, 성장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외형주의, 율법주의가 왜 성서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순수한 복음의 선포가 중요하다. 현대교회의 타락의 원인은 바로 왜곡된 복음의 선포에 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가 성서의 시각으로 복음을 재해석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목회자의 몫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와 선포에 생명을 건 목회자가 교회 갱신의 횃불을 들어야 한다. 복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하고, 스스로 실천하며,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그 영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섬기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목회자와 성도들이 넘쳐날 때, 교회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로 거듭난다. 한 영혼을 위해 울고 웃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된다. 이런 공동체는 파편화되어 정처 없이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는 진정한 ‘산 위의 동네’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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