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근세의 교회 (6)

V. 19세기 이후의 개신교 신학과 사상(2)

1) 자유주의를 주창한 대표적인 인물들과 그 사상(2)

(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 )

- 성경은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 성경이 증명되지 못하면 믿지 않아도 된다.
- 성경 안에는 신화가 존재한다(Demythologization).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 신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양식 비평’의 선구자였다. 그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프랑스의 장 폴 샤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성경의 비신화’를 주장하였다.

(5)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은 곧 신앙이다(“Faith is the state of being ultimately concerned”).
- 진실과 정의, 인간성과 초월적인 영적 관심, 사회적인 관심, 경제적인 관심, 건강하고 좋은 삶들 그리고 그 국가와 민족이 갖는 최대의 관심사 이 모두가 신앙의 대상이다.
- 성경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할 만한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을 차용한 폴 틸리히는 기독교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많은 지성인들의 관심을 기독교로 돌리게 하였으며 가끔 신화와 상징이 가장 심오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계의 중심 인물.

19세기 초반의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슐라이에르마허와 19세기 후반의 신학을 대표하는 알브레히트 리츨이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지난호에 간단하게 기술한 바 있다. 알브레히트 리츨(1812~1889)은 자유주의의 산실인 튀빙겐 학파의 영향 하에 있다가 철학(헤겔주의)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사유에 관한 어떠한 형식도 신학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신앙의 주제는 형이상학적 지식이 아니요, 도덕적 가치라고 설명하였다. 신비주의를 배격하였으며 슐라이에르마허를 공격했다.

3) 19세기의 세 가지 운동

뛰어난 신학자들과 더불어 세 가지 운동 혹은 조류가 있었는데 그것은 1) 사회 복음 운동, 2) 역사적 예수의 탐구, 3) 영국교회의 옥스포드 운동인데, 앞의 신학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 사회 복음 운동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자본주의로 인하여 사회 문제가 제기된 것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윌터 라우센 부쉬의 저서

『기독교와 사회 위기』와 『사회 복음신학』에 잘 나타나 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질서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죄악성을 공격해야 한다. 이러한 공격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복음은 개인적인 구원이나 개별적인 도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즉 정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라고 크리스천들을 부른다. 이 운동은 현재까지 사회의 현장에서 복음 전파와 선교를 역사적으로 탐구, 감당하고 있다.

(2) 역사적 예수 탐구

자유주의 튀빙겐 학파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브루노 바우어(1792-1860)는 헤겔의 합리주의 철학 원리를 신약성경 연구에 적용하였다.

베드로로 표시되는 원리적인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을 창시자로 하는 이방의 기독교 공동체로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성경문서 안에는 순수한 베드로적인 견해나 혹은 순수한 바울적인 견해를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학파의 몇몇 학자들은 성경이 훨씬 후대에 기록된 가톨릭의 종합의 결과라고 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개체성을 그의 말씀과 분리시키는 모든 시도와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넘어서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3) 영국의 옥스포드 운동

영국내의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영향력에 맞선 것으로 추상적인 신앙의 문제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경건의 문제였다. 즉, 심오한 예배 갱신, 수도원 규율의 부흥, 보편적 교회의 전통과 연관을 가진 경건의 각성 등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목적과 권위가 있으므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2.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1) 신정통주의란?

1919년, 스위스의 작은 교회의 목사였던 칼 바르트는 아주 과격한 취지의 로마서 주석을 썼다.

어느 가톨릭 신학자는 이 로마서 주석을 가리켜 자유주의 사상의 전형적인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신교 신학 내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신학자는 그 책을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하였다.

주석 제2판인 1921년에 나온 수정판은 첫판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역이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현저한 특징이다. 자유주의는 세상에 내재한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바르트는 이에 반대하여 전적인 타자로서만의 하나님을 주장하였다. 19세기의 자유주의는 인간을 하나님 위치에 올려놓았고, 바르트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고 외쳤다.

2) 신정통주의의 성경관

신정통주의는 비성경적인 자유주의를 공박할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성경 중심주의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돌프 폰 하르낙에 대한 공박으로 시작한 자유주의에 대한 비평과 성경으로 돌아오려는 신학적인 몸부림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Let God Be God not Man.”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계시 곧 말씀이 아니다. 단지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계시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아니라 말씀 안에서의 “만남이요, 부딪침이요, 대화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계시됨은 성경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하여 좌우된다. 즉 신앙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신정통주의가 자유주의의 계시관에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부분이다. 원죄와 타락을 Saga(칼 바르트) 혹은 Myth(에밀 브루너)로 해석한다. 성경관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못하여 다른 교리 또한 완전한 자유주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도 아니고 정통주의도 아닌, 신정통이란 새로운 줄기의 신학을 주도하긴 했으나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서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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