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4).

기다림의 의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으로 치닫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더 이상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아이들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별한 돌봄 속에 성장합니다. 여간해서는 배고픔이라든가 더러움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그만큼 여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진 만큼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능력과 소유를 사용해 가급적 기다림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갑질이 만연하고, 인간관계는 그만큼 파괴되고, 쾌락은 있지만 행복이 없는 삶 속으로 속수무책 현대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기다리기 싫어하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즉석에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간편한 휴대용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의 삶 속에서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문제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더 이상 현대인들이 기다림을 배우지 않고, 기다림 자체를 무능력과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이 무엇인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복원에 앞장서야 합니다.

영적인 기다림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일 뿐 아니라 믿음의 시금석이며 참된 믿음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성숙의 과정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인의 의인됨은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이전에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시가 되고 꽃이 됩니다. 그것이 마침내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영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합니다.

구조와 배경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서에는 선지자 자신과 그의 시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6을 보면 갈대아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하박국서의 연대는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와해시키고(주전 612년)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은 주전 600년대 초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3에서 왕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전 598년의 첫 번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아직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경, 즉 나훔(주전 650) 이후,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와 히브리서에도 기록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613개의 계명을 주었다. 다윗은 그것을 11개(시15편)로 줄였고, 미가는 3개(6:8)로 이사야는 2개(56:1)로 줄였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것을 단 하나로 요약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분의 뜻이 확실한 때나 의심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신실하게 그분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유다)의 불의를 벌하지 않으시고 방관하시는 것에 대한 선지자 하박국의 탄원으로 시작합니다(합 1:2-4).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 유다의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십니다(합 1:5-11). 이에 대해 하박국의 두 번째 탄원이 이어집니다(합 1:12-17).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박국의 통보 (1절)

1절은 하박국의 통보로서 선지자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지금 그는 좋은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소식을 알리는 자입니다. 성 앞에 적국이나 지원군이 나타나면 이를 곧바로 성 안의 지휘부에 알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을 그런 파수꾼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하러 나타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의지를 갖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다리지만 않고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질문이란 단어는 "항의, 비난, 논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휘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며 대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지자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바라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통해 어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치실 수 있느냐는 비난조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성벽 위에 세워진 망대나 요새를 가리킵니다.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은 자리로서 전략적인 위치입니다. 이곳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분이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불굴의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의 증표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인간은 늘 즉각적인 변화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가시적 성취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너머를 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어갑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가시적인 성취가 없어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망대로 올라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2-3절)

하박국은 마침내 하나님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질문에만 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보여 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당신이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입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말씀의 전달 범위를 넓혀 주며, 영향력 또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이 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외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것을 똑똑히 읽을 수 있도록 판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의 사역은 문서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 판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 경내에 붙여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정한 때라는 말은 여인이 잉태한 후 아이를 낳을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비록 하나님의 계시가 지시하고 약속한 시간이 너무 길고 때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때가 되면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한 때 역시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 쓰인 묵시는 후대의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선택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후대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쓰인 묵시, 혹은 종말이라는 단어는 아주 근접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한 때와 종말이라는 말은 갈대아 사람으로 인한 곤경이 머지않아 종식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한 때나 종말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곳에서 선포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동시에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가능한 뒤로 미루는 인간들의 궁여지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섭리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격려 (4)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4절의 "그"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바벨론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관심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유다입니다. 그래서 4절의 핵심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신실 등을 포함해 광범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에무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박국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어떤 관계의 요구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실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의 가르침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사람이며,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시험과 심판의 때에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기서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올 것입니다. 비록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벌할 때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 권력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세속적 권력에 반드시 종말이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력이 오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꺾으실 날이 가까이 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의와 무질서,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으로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모든 질문들은 이 말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모두 풀렸습니다. 그것은 한 단계를 더 거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그 단계는 바로 침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침묵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를 지나 진리의 근처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주치는 인간 지성의 한계이며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비단 신앙의 삶 속에서만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는 깊은 세계로의 관문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측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근대의 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진리를 망각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끈은 과학자 포퍼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장자(莊子) 역시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자만에서 비롯됩니다. 장자의 말대로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합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 침묵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비록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결핍들을 오히려 은혜로 받아 기쁨의 찬양을 부르기에 이릅니다. 기다림이 낳은 찬양입니다. 기다림이 맺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비록'의 신앙,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침묵이라는 신비의 관문을 지나 마침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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