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6일, 오늘은 나에게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드디어 70세가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오래 살았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참으로 죄 많은 날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머리를 높이 들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사 내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그분의 금쪽 같은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으며 피 흘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을 호소하는 자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고통으로 죽어갈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치유를 받도록 하신 것처럼 죄에서 놓여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 떠날 준비를 하고 아주 많이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물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반드시 붙지만 말입니다. “몇 년이 지나면 그때에 내가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리로다”(욥 16:22).

매일 아침 기체조인 차륜궁을 약식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이 체조를 하려면 두세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습관이 되어서 이 체조를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찝찝합니다. 오늘은 체조 도중에 “너는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내 나이 70에 이르도록 나의 믿음 생활이 겨우 인생의 1/2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기본인 “두려움”은 등 뒤에 두고 오직 “사랑”만 외치고 있었으니 반쪽짜리 믿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내 앞에 와 있습니다. 내가 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자에 대한 특별한 은총과 믿는 자들은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일반 은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찬송가 중에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이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찬송가의 가사처럼 나 같은 한없는 죄인이며 어리석은 자에게 때마다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는 망각하고 매사에 나의 자유의지만 대입하여 바둥대고 있었던 나를 보게 됩니다.

어리석은 행동들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와 같이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불법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 53:1). 이에 대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한 인간이 만들어 낸 죄의 소산이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렸고,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타락한 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전개되는 오늘날에 있어서 성도는 하나님을 겸손히 찾고, 그분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며 통치자요, 주권자가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려야 할 책임 있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찬송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처럼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신년 계획에 있는 ”행동하기 전, 말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3초의 간격(쉼)을 유지한다.”를 더욱 더 활성화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들에 대하여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이후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치에 맞는 말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 것입니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할 경우에 지금까지 나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깡그리 부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바라는 것이 됩니다. ‘지식이 없는 말들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 자가 누구냐?“(욥 38:2)

내 이름이 하나님이 소유하신 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이제는 두렵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레슬리 B. 후린)』라는 조그마한 책에서 저자는 “허약한 시몬(베드로) 속에서 굳은 반석을 찾아내듯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의 잠재 능력을 아신다. 당신의 성미가 아주 급한가? 당신이 그리스도를 찾아가면 그는 당신을 “평온”이라고 부를 것이다. 당신이 무사인가? 그리스도는 당신이 만족할 갑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당신이 화를 잘 내고 고집이 세다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유쾌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이 동성애를 하거나 간통을 한다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순결”이라 부를 것이다. 마치 진흙 같은 시몬을 베드로라 부른 것처럼, 시몬의 성품은 구세주를 만남으로써 변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 의 문을 열어 놓으면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경 말씀을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고, 성경 말씀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미성숙한 믿음이라면 나는 단연코 미성숙한 믿음을 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내가 좋은 대로 말씀을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가 아주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고지식하게 말씀 모두를 따르고자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성경 1,845절에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르되, 간청하건대, 오 주 하늘의 하나님 곧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을 위해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느 1:5).

또 주일인 오늘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날이 될 것 같습니다. 광고 시간에 예배 후 오후 1시 30분부터 아가페룸에서 당회와 면담이 있으니 원하는 분은 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당회에서는 듣기만 하겠습니다, 하면서 지난 주에 노회에 참석하였다고 운을 뗍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목사 두 분과 장로 다섯 분이 참석하였으며, PCUSA의 헌법 조항 중에서 결혼의 정의에 대한 개정안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동성혼도 인정한다는 조항이라고 합니다. 재작년과 작년에 처음으로 교단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단호하게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행위를 반대한다고 천명하던 분이었는데 오늘은 그 문제에 대한 교인들의 의견을 듣고자 한답니다. 노회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PCUSA 교단을 탈퇴하지 못할까요? 새 성전 짓는다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매번 장로님들이 대표 기도를 하시던데, 하나님께서 어련히 잘 이끌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건축 자금이 부족하여 교단으로부터 저리로 자금을 빌려야 하기 때문에 눈치 보는 것인가요?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 좋다. 열심히 믿어라. 그리고 행해라“라고 격려하는 성경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오기 훨씬 전에 김진홍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쯤일 것입니다. 그분이 수감 생활을 끝내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그분은 당시에 대단한 진보주의자였습니다. 청계천 빈민가에서 넝마주이들의 두목 노릇을 하면서 목회를 하였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눈앞에서 보고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에는 보수 진영의 리더가 되어 선거 운동을 했습니다.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진정한 진보가 아닌 친북 좌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학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학교였다고 하는데 학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유학 생활 6개월쯤 되었을 때 어느 교수가 들어오더니 동성애에 대한 의견들을 말해 보자고 하여 김진홍 목사가 성경 말씀을 인용해 동성애를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교수가 정색을 하면서 “네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동성애도 사랑으로 감싸 주실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김진홍 목사는 그 길로 유학을 멈추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강단 있는 행위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중 일부를 옮깁니다. ‘“사랑”은 반드시 “거룩함”이라는 궤도 위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모든 “사랑”은 기준이 있어야 바른 사랑이 될 수 있는데 그 기준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사랑”은 488회가 나온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엔진이 아무데나 굴러가면 무절제의 도구가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랑”의 엔진을 조절하여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므로 그것은 “사랑”보다 높은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언급하였던 교수가 주장하는 사랑의 정의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 참에 동성애 문제와 주님의 결혼관을 성경 말씀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동성애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 주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남자들은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롬 1:26-28).

또 주님은 결혼에 대하여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그가 너희에게 이 훈계를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막 10:5-9).

우리는 지금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의 한 획도 바꿀 수 없으며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유전자나 교단의 헌법이 복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바늘구멍으로도 물이 스며들 수 있으며 곧 수습할 수 없는 커다란 출입구가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미리 수습해야만 합니다.

다음의 4월 15일자 기사는 어느 지혜로운 교회의 결단에 대한 것입니다.

‘로스앤젤리스 근교 롤랜드 하이츠에 있는 선한목자장로교회(고태형 목사)가 미국장로교단(PCUSA)에서 탈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선한목자장로교회는 PCUSA에 속해 있던 대표적인 한인교회 중 하나다. 샌 가브리엘 노회 소속인 선한목자장로교회는 고난주간 첫날인 3월 30일, 공동회의를 열고 교회원 7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단 탈퇴 안건을 찬성 709명, 반대 33명, 무효 3명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에 선한목자장로교회측은 “더 이상 선한목자장로교회 당회와 이사회는 PCUSA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으며, “복음주의장로교단(ECO, Covenant Order of Evangelical Presbyterian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선한목자장로교회측은 탈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로 ◇ 교단이 신학적으로 진보성을 띠며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 공동회의 91% 이상이 교단 탈퇴를 찬성한다 ◇ 노회가 재산권 문제로 정책을 개정해 탈퇴를 어렵게 만든다, 등을 들었다. 선한목자장로교회는 3년 전부터 PCUSA의 동성결혼 수용에 대한 정책에 이견을 보이며 교단 탈퇴 절차를 진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건물과 재산권 등을 두고 노회 및 노회 탈퇴 반대측과 갈등을 빚어왔다.

이 교회의 PCUSA 교단 탈퇴는 공식화되었지만, 건물을 지키려는 교회와 교단 헌법에 따라 재산권을 주장하는 노회의 분쟁이 다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PCUSA 소속 한인 교회들의 교단 탈퇴가 이어질지 주목된다.‘

우리 교회도 여기에 속하길 바랍니다. 내가 미성숙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악의 꽃은 하룻밤 사이에 피어나지 않습니다.

찬송가 외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소질이 전혀 없어서 귀에 익은 찬송가를 찾았습니다. 찬송가 중에 열한 곡을 뽑아서 별지에 기록하고, 그 종이를 갖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외우면서 또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아홉 번째 곡을 외웠는데 그 찬송가 제목이 “환난과 핍박 중에서”입니다. 유독 이 곡을 부를 때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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